이미지 변신·연기력 발휘할 기회로 미움 받아도 행복한 빌런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감정 ‘악’
연기력 받쳐주면 감화되기 쉬워
악역이라고 모두 사랑받진 않아
선한 인상 반전 빌런 뇌리에 각인
극 중 빌런 향한 호감은 긍정적
연기한 악행 정당화 돼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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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차오르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독한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통상의 교육과정과 사회화를 적절하게 거친 보통의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그걸 자의로 억누르고, 표출 강도나 범위를 최소화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위해로 실재화되는 일이 없도록 부단히 애를 쓰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정이 완전히 무(無)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옅어지거나, 혹은 그보다 더 우선시되는 사회적 규범이나 인간성에 설득돼 마음속 깊은 곳으로 물러난 상태다. 그런 점에서 ‘악’은 의외로 대중에게 감화되기 용이하다. ‘악’을 도맡는, 작중 ‘빌런’들이 유독 더 관심을 받는 요즘은 이러한 감정의 태동과도 연결된다.
최근 시즌2가 종영된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카지노’ 속 주인공 차무식(최민식)은 극 중 필리핀의 ‘카지노 제왕’으로 군림하는 범법자다. 시즌1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성장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리며 차무식이라는 인물의 서사를 착실하게 다졌지만, 그렇다고 그가 ‘악’이란 명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법보다 주먹, 논리보다 권력이 무조건 앞서는 그가 누리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눈물이고 피와 땀이다. 이런 형태로 악당이 주인공 역할을 꿰차는 작품은 본디 ‘피카레스크’ 장르로 구분돼 악인임에도 공들인 정당성이 부여된다. 어쨌든 그는 작품을 이끌어야 하는 주인공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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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 파트1, 그리고 지난 10일 공개된 파트2는 물론이거니와 종영 이후에도 여전히 대중의 최대 관심을 받고 있는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의 경우는 좀 이질적이다. 주인공 문동은(송혜교)과 적대시하는 학교폭력 가해자 집단 5인은 철저하게 ‘빌런’의 롤을 꿰차고 있음에도 대중의 관심을 받고, 진득하게 조명되고 화제가 된다. 해당 배역을 맡은 배우들 역시 다양한 러브콜이 쏟아지면서 작품 이전보다 인기와 인지도를 몇 배는 상향시켰다. ‘동은 5적’의 수장에 가까웠던 ‘박연진’ 역의 배우 임지연은 최근 JTBC ‘뉴스룸’에 단독 출연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주인공 송혜교와 어깨를 견줄 만큼의 인기와 관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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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021년까지 총 3개의 시즌을 선보이며 격렬한 관심을 휩쓴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 김순옥 작가 사단이 선보이는 차기작으로 공개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tvN 드라마 ‘판도라: 조작된 낙원’ 역시 주요 배역을 ‘빌런’이 꿰차고 있다. 특히 주인공 홍태라(이지아) 곁에서 가장 강력한 아군으로 인지됐던 표재현(이상윤)이 고작 6회 만에 최대 ‘빌런’으로 반전을 선사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같은 행태는 드라마 ‘일타 스캔들’과 ‘모범택시2’에서 잇따라 ‘반전 빌런’을 소화하며 작품에 변주를 가미한 배우 신재하와 유사성을 내비친다. 주로 모범적이고 선한 느낌의 캐릭터를 맡던 배우 이상윤은 이를 통해 기존 이미지를 벗어던졌으며 ‘판도라: 조작된 낙원’의 인상적인 키맨으로 급부상했다. 신재하는 두 편의 작품으로 이름과 얼굴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깔끔하게 성공했다.
작품 속 ‘빌런’을 대하는 사회 통념과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극 중 리얼한 악역 연기로 말미암아 광고가 모두 끊기거나 실제 현실세계에서조차 밉상으로 낙인찍혀 타인의 ‘등짝 스매싱’(?)까지 마주했다는 여느 악역 배우의 고백은 어느덧 까마득한 시절의 유물이 됐다. 이제는 오히려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연기자로 주목받을 확률이 높고, 노력 여하에 따라 연기력 면에서 주인공보다 더 박수 받는 경우도 늘었다. 농도 짙은 캐릭터의 질감은, 기존에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연기 변신’ 용도로도 유용하게 활용된다.
그렇다고 마구잡이식 ‘빌런’이 모조리 다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익숙한 클리셰를 벗어난, 쉽게 본 적 없고 개성이 아주 뚜렷한 ‘빌런’이 뇌리에 각인되기 쉽다. 핑거스냅으로 모든 생명체를 절반으로 줄인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의 최종 빌런 타노스를 떠올리면 좋다. 국내에서는 마석도(마동석)를 공통분모로 하는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가 있다. 매 시리즈를 구분 짓는 것은 메인 빌런으로, 1편의 장첸(윤계상)과 2편의 강해상(손석구)이 대표적이다. 이들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뇌리에 강렬한 잔상이 남는 ‘빌런’ 이미지를 지속하지 않고, 타 작품에서 이를 온전히 씻어 낼 수 있느냐다. 선악이 공존하는 얼굴, 그것을 뒷받침하는 연기력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영화 ‘범죄도시2’로, 그리고 다시 시리즈 ‘카지노’를 단시간에 오가며 선악을 소화한 손석구가 적절한 예다.
‘빌런’을 향한 대중의 호감과 사랑이 그것을 소화한 배우나 작중 인물을 향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행여라도 그들이 행하는 악행, 감정과 폭력을 고스란히 타인에게 노출하는 행위 자체로 흐르는 일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것이 자칫 인간의 마음속 깊숙한 곳으로 물러난 ‘악’을 끄집어내는 도화선으로 작용해서도 안 된다. 극 속 ‘빌런’을 사랑받게 하되 그의 악행을 정당화하지 않아야 하고, 선악의 판단을 모호하게 만드는 일로 자칫 현실세상의 실제 범죄로 구현되지 않도록 고민하는 것은 제작진과 배우,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과 시청자 모두의 몫이다. 영화는 영화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니 그걸 도구로 악용해 자신의 악행을 희석시키고 포장하는 핑곗거리로 삼는 일은 결코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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