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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처인성전투 기록화

신인호

입력 2023. 03. 23   15:38
업데이트 2023. 03. 2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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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치는 전투를 담아낸 처인성전투기록화. 지석철 화백의 작품으로 전쟁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전쟁기념관
용인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치는 전투를 담아낸 처인성전투기록화. 지석철 화백의 작품으로 전쟁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전쟁기념관

 

고려시대 최씨 무인정권이 통치하던 13세기 초, 몽골은 원수 살리타이(撒禮塔)를 앞세워 고려를 1차(1231.8. ~ 1232. 1.)에 이어 1232년 8월부터 2차 침공했다. 당시몽골군은 3개월 만인 11월에 남경(한양)을 함락시키고 한강을 건너 광주를 거쳐 남부지방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광주산성(지금의 남한산성)에서 강한 저항으로 용인 방향으로 향했으나 용인에서 살리타이가 전사하면서 철군하게 된다. 바로 처인성에서다.(기사 중 일시는 음력)

 

고려시대 처인은 수주(水州:오늘날 수원과 화성 일대)의 속읍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부곡이었다. 고려 때 역원제도에 따르면 개경에서 평택, 안성 방면이나 남쪽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다고 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처인성에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인 ‘군창’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자체는 평지에 흙으로 쌓은 토성이다. 면적이 1920㎢ 정도이고 남아 있는 성의 길이는 약 250m이다. 규모가 작아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도 ‘처인부곡의 작은 성(小城)’으로 표현했다.

 

이 작은 성에 살리타이가 1232년 12월 16일 휘하의 기병 500여 기를 투입해 공격을 해왔다. 성에는 난을 피해온 주민과 피난민 등 1,000여 명, 처인성에서 남서쪽으로 40리쯤 떨어진 곳의 백현원이란 곳에 적을 두었던 승려 김윤후(金允侯) 등 승병 100여 명이 있었다.

 

김윤후가 이끈 승병과 주민은 훈련 한번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상태에서 몽골군과 격돌했다. 김윤후는 처인성 동문쪽으로 나가 살피던 중 소우의 정찰병을 이끌고 접근하는 살리타이 일행을 기습해 전원 사살했다. 살리타이가 전사하자 몽골군은 크게 동요하여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왕은 몽골군을 물리친 공을 세원 김윤후에게 상장군(上將軍) 벼슬을 내리려 했으나 김윤후는 “싸울 때 나는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어찌 감히 헛되게 많은 상을 받겠는가”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에게 공을 양보하고 정6품의 무관 섭랑장(攝郞將)의 벼슬을 받았다.

 

지석철(홍익대 회화과 교수) 화백은 처인성을 수차례 답사하며 이렇듯 승장(僧將)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친 전투상황을 화폭에 담아냈다. 살리타이의 뒤로 4마리의 소가 2열로 이끌며 몽골군의 지휘소인 게르(빠오)와 처인성을 향해 돌격하는 몽골 기병부대, 처인성내 고려인들이 일치단결해 용감하게 항전하는 모습, 김윤후가 몽골의 살리타이를 향해 활로 쏘는 장면 등이 표현되어 있다.

신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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