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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영화 - 알제리 전투(1965)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
출연진: 브레힘 하자드, 장 마틴, 야세프 서디
2차 대전 후 알제리 독립전쟁 배경
프랑스 식민 치하 벌어진 학살·고문
기록영화 찍듯 사실적으로 담아내
프랑스선 5년간 상영 금지하기도
“1945년 5월 8일, 그러니까 15년 전 알제리 민중은 일부 정치수를 석방하고 알제리에서의 인권 존중을 요청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날 저녁 4만5000구의 알제리인 시신이 매장됐습니다. 양심에 분노를 일으키는 이 수치는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수치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 명의 프랑스인도 이 문제로 법원에 출두한 적이 없습니다.” (『알제리 혁명 5년』 중, 프란츠 파농 지음, 인간사랑 펴냄)
독립 외친 알제리인 수만 명 학살 당해
제2차 세계대전사에서 1945년 5월 8일은 해방의 환희나 자유의 새 출발로만 기억할 수 없다. 알제리 민간인 4만5000명이 희생된 ‘세티프 학살’ 때문이다.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 그날 알제리 북부 도시 세티프에 수많은 사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립을 외쳤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폭압적인 진압이 시작됐고, 알제리 깃발을 들고 있던 12세 소년이 프랑스군이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분노한 시위대와 프랑스군의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프랑스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과 정규군, 외인부대까지 출동시켜 참혹하게 복수했다. 40개 알제리인 거주 마을에 수류탄과 박격포를 무차별적으로 퍼부었다.
학살의 발단은 프랑스가 2차 대전 중에 알제리인들에게 제시한 약속, 즉 북아프리카의 연합군 작전에 참여하면 해방으로 보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 사건을 빌미로 냉혹한 식민 통치를 강화했다. 알제리인들에게 5월 8일은 새로운 폭력의 시작이었다.
사실 알제리는 이전부터 내부적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1830년대 이래로 알제리는 세 가지 사회집단이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다. 첫째, 군인과 관료 외에 100만 명의 유럽 정착민이 있었다. 이 공동체는 아이러니하게도 알베르 카뮈, 자크 데리다, 피에르 부르디에 같은 작가와 지식인을 배출했다. 둘째,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해 식민지 내에서 공식 혹은 비공식 특권을 부여받은 베르베르인이었다. 셋째, 도시의 빈곤한 주택지대로 들이닥치던 수백만 명의 무슬림 아랍인이었다.
사회구조는 인종적 편견에 따라 층이 이뤄진 샌드위치와 같았다. 프랑스인은 스페인인을 경멸했고, 스페인인은 이탈리아인을 경멸했고, 이탈리아인은 몰타인을 경멸했고, 몰타인은 유대인을 경멸했다. 그리고 모든 인종이 아랍인을 경멸했다.
기회의 균등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1945년에 20만 명인 유럽인 자녀를 위한 초등학교는 1400개였고, 125만 명의 회교도(무슬림)를 위한 학교는 699개였다. 교과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 조상 갈리아인은….”
테러-반테러 교과서가 된 ‘저주받은 걸작’
영화 ‘알제리 전투’(1965)는 프랑스 식민 치하 알제리인들이 벌인 독립전쟁(1954~1962)이 배경이다. 1956~1957년 수도 알제에서 벌어진 테러와 보복 테러, 체포와 고문, 살인과 진압이 끝없이 물고 물리는 폭력의 환멸을 담아냈다.
영화는 1957년, 한 늙은 밀고자의 괴로운 시선으로부터 시작한다. 심한 고문의 흔적을 숨기지 못하고 떨고 있는 밀고자는 프랑스 공수부대원들을 아랍인 밀집 지역인 카스바로 안내한다. 프랑스 식민통치에 저항한 민족해방전선(FNL) 지도자 알리(브레임 하쟈드)의 은신처를 누설한 것.
마티유(쟝 마틴) 대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알리에게 나오지 않으면 건물을 통째로 폭파하겠다고 위협한다. 프랑스군의 회유 시간은 단 30초. 오직 해방을 목표로 투쟁해 온 알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상념에 잠긴다. 그리고 치열했던 지난 3년을 회상하는데….
영화는 네오리얼리즘(2차 대전 이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하고자 했던 운동)의 거장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이 기록영화를 찍듯 강렬하고 사실적으로 담아낸 불후의 걸작이다. 거친 질감의 흑백 화면 속에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알제리 민중들의 분노에 찬 눈동자가 빛난다.
하지만 감독은 FNL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군대의 잔혹함뿐만 아니라 FNL의 숙청, 여성이나 아이를 이용한 보복 폭탄테러 또한 여과 없이 같은 시각으로 투영해냈다. 왜 이 영화가 ‘가장 위대한 정치영화’로 불리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런 리얼리즘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프랑스 당국은 고문 사실 자체를 부정하며 5년간 국내 상영을 금지했다. 1966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도 훌륭하다.
1831년 창설된 프랑스 외인부대, 지금도 해외 분쟁 개입 때 투입
‘용병’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프랑스 외인부대(Legion Etrangere·레지옹 에트랑제)다. 1831년 프랑스 루이 필리프 1세가 설립했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알제리 같은 해외 식민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필리프 1세는 외국인들로 5개 용병부대를 꾸려 알제리에 파병했다. 이유가 있었다. 외국인이고 모병이다 보니 위험한 전투에 투입하기 쉬웠다. 불만 가득한 퇴역 병사들과 유럽 각국에서 몰려든 망명자, 부랑자들을 정리하는 일석이조 카드이기도 했다.
프랑스 외인부대가 전설이 된 건 1863년 4월 30일 멕시코에서 벌어진 카메론전투 때문이다. 금화를 수송하던 외인 부대원 65명이 멕시코군 3000명과 맞닥뜨렸다. 외인 부대원 60명이 죽었을 때 멕시코군 사상자는 500명이 넘었고, 총알이 떨어지자 마지막 남은 5명도 항복 대신 착검 돌격을 감행했다. 이 전투를 기려 ‘레지옹 에트랑제’는 매년 4월 30일 퍼레이드를 벌인다.
모병 대상은 만 17~40세 남성으로 시험만 통과하면 국적, 인종, 언어능력을 따지지 않고 채용한다. 기본 복무 연한은 5년이며, 이를 채우면 프랑스 시민권 및 연금 수령 자격을 얻을 수 있다.
부대 구호는 ‘레지오 파트리아 노스트라(Legio Patria Nostra)’. ‘(외인)부대는 나의 조국’이라는 뜻이다. 국적, 입대 동기 등 스펙트럼이 다양한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은 그들이 속해 있는 ‘외인부대’ 자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외인부대는 보병·기갑·공병·공수로 구성된 8개 연대와 1개 여단, 분견대의 편제를 유지하는 군단급 부대다. 부대원은 장교 450여 명, 부사관 1600여 명을 포함해 9000명 내외다.
지금도 프랑스는 해외 분쟁에 개입할 때 외인부대를 선봉으로 투입한다. 부대 창설 후 현재까지 약 3만 회가 넘는 전투를 수행했다. 1, 2차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알제리전투는 물론이고 1991년 걸프전, 1993년 발칸분쟁, 1994년 예맨 사태, 2011년 이라크 전쟁, 2014년 말리 사태 등 프랑스가 개입한 해외 분쟁에 빠짐없이 파견했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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