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33) 백의걸 6·25참전유공자회 양평군지회장

입력 2023. 03. 13   16:41
업데이트 2023. 08. 0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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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33 백의걸 6·25참전유공자회 양평군지회장

17세에 입대 
32년 6개월 군에 몸담아

70여 년
지났지만
생사 함께한
전우 그리워

준위 예편
행사서
부대 사열한
첫 사례

1948년 친척과 함께 고향 떠나 서울로
신의주에 계신 부모님과 영영 헤어져

전쟁 터지자 국군 이동로 따라 피란길
1952년 4월 군 입대…석 달간 훈련
대구 육군본부 배치…차량 배차 임무
대구 인근 산야서 공비토벌작전도

정전협정 체결 후 6군단 행정요원 차출
1955년 일등중사 되며 군 생활 이어가
1984년 육군5사단서 준위로 예편

군복 벗고 참전유공자회 양평군지회 가입
회원 평균연령 93세
요즘도 매달 지역 참전용사 찾아가
지자체·교육청 협조받아
6·25전쟁 참상 알리기 계속해

백의걸 6·25참전유공자회 양평군지회장이 자택에서 국방일보와 인터뷰 도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백의걸 6·25참전유공자회 양평군지회장이 자택에서 국방일보와 인터뷰 도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84년 육군5보병사단에서 진행된 백의걸 지회장의 전역식 모습.
1984년 육군5보병사단에서 진행된 백의걸 지회장의 전역식 모습.

 

6·25참전유공자회 양평군지회 회원들이 지평리참전비를 배경으로 찍은 단체사진.
6·25참전유공자회 양평군지회 회원들이 지평리참전비를 배경으로 찍은 단체사진.



어느 조직이든 구성원들이 소임을 다해야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성과가 나온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전장에서 직접 싸우는 장병뿐만 아니라 각자 맡은 임무를 완수해야 전투력 상승효과로 이어진다. 6·25전쟁에서도 한 명, 한 명의 참전용사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백의걸(89) 6·25참전유공자회 양평군지회장도 전쟁 당시엔 육군본부에서, 이후로는 준위로 예편하기까지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역할을 해냈다. 그런 그가 국방일보 연중기획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서른세 번째 주인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글=배지열/사진=백승윤 기자


피란 생활 중 군복 입은 17세 소년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의 백옹은 1948년 친척과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당시 백남공업중학교(현재 단국대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3학년에 등록했지만, 생계 때문에 일을 병행하느라 제대로 다니지는 못했다. 가족과 떨어진 상황도 어린 소년에게는 가혹한 현실이었다.

“고향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가 남으셨습니다. 작은아버지네 식구들과 저만 옮긴 건데, 그 이후로는 전쟁 통에 뵙지 못한 게 지금도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어린 소년은 국군의 이동로를 따라 남으로, 북으로 이동했다. 길고 긴 피란길에 지치고 전장의 치열함이 더해지던 1952년 4월 10일, 17세 소년에게도 군복을 입으라는 나라의 부름이 떨어졌다.

백옹은 “입대하기 전 고모가 ‘우리 장손, 총알을 맞아도 철갑처럼 튕겨 나가길’이라고 울면서 기도해 주셨다”며 “지금 돌아보면 그 기도 덕분에 내가 무사하지 않았나 싶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3개월간 제식, 철책 통과, 수류탄 투척 훈련 등을 받은 백옹은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에 배치받았다. “장병 대부분이 글을 몰랐는데, 그래도 학교에 다니면서 글을 좀 썼던 걸 좋게 봐 주신 것 같습니다. 육군본부에 근무해 전투 경험도 별로 없는데, 제가 주제넘게 그때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행정업무를 맡은 그는 주로 차량 배차 임무에 투입됐다. 백옹은 “입대하기 전 차에 관심을 가졌던 게 큰 도움이 됐다”며 “주로 국군병원에 부상병 후송용 차량을 많이 배정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군에서 운용하던 차량 대부분이 일제 트럭 또는 미군 원조로 들여온 차량이었다. 장비와 무기 등 전반적으로 상황이 열악할 때였다. “육군본부도 전장처럼 힘든 조건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미군용 내복을 입어야 추위를 피할 수 있었고, 식사도 대부분 꽁보리밥이었죠.”

백옹도 적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됐다. 대구 인근 산야를 다니면서 전개한 공비토벌작전이었다. 1개 연대 규모의 장병이 눈에 띄지 않는 적과 싸운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70여 년이 지났지만, 함께 생사를 넘나든 전우에 대한 그리움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백옹은 “육군본부에서 근무할 때 이병부터 병장 때까지 같이 생활한 이종환의 소식이 궁금하다”며 “정전협정 체결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시점에 미군 운전병으로 전출 갔는데, 이후로 생사를 알 수 없어 안타깝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준위로 32년 6개월 군 생활 마무리

정전협정 체결 이후 백옹은 경기도 포천에 창설·주둔한 6군단 행정요원으로 차출됐다. 부대가 처음으로 자리 잡는 만큼 행정업무뿐만 아니라 육체노동 작업도 필수일 때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힘듦과 포기’라는 표현보다 ‘최선과 열심’이라는 단어가 먼저였다.

그렇게 백옹의 군 생활은 1955년 9월 1일 자로 일등중사(현재 하사)가 되면서 이어졌다. 당시 부관병과(현재 인사행정병과)를 선택한 그는 육군본부 정훈공보국을 거쳐 이등상사(현재 중사)로 진급했고, 보병학교에서 6개월의 교육을 거쳐 1969년 9월 준위로 임관했다.

“군복을 입지 않았다면 아마 자동차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렇다고 군인으로서 지낸 시간을 후회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백옹은 1984년 9월 30일 육군5보병사단에서 준위로 예편했다. 전쟁 때 군복을 입은 후 32년 6개월 동안 군에 몸담았던 것. 그가 꺼낸 빨간 외피의 앨범에는 전역식 사진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백옹은 “그때 듣기로는 준위 예편행사에서 부대를 사열한 첫 사례라고 했다”며 “많은 분의 도움으로 무사히 전역식까지 치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고 말했다.


지역 참전용사 찾아다니는 지회장

군복을 벗은 그는 재향군인회와 함께 6·25참전유공자회 양평군지회에 가입했다. 당시만 해도 회원 수가 300여 명에 달했다. 행사를 개최하면 장소가 빽빽하게 들어차곤 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백옹이 2020년 지회장으로 취임할 때 회원은 174명으로 줄어 있었다.

“평균연령도 93세로 갈수록 나이가 많아지는 만큼 이제 얼마 안 가 해산해야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도 목숨을 바쳐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킨 사람들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러 활동을 해 나가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백옹은 지난달 16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전투 전적비 일대에서 열린 ‘제72주년 지평리전투 전승 기념행사’에도 지역 참전유공자회 지회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지평리에서 벌어진 지평리전투는 미 2사단 23연대와 배속된 프랑스대대 등 유엔군이 중공군의 대공세를 막아 낸 전투다.

지난 설 연휴에는 표창수(소장) 육군2신속대응사단장이 백옹의 자택을 찾기도 했다. 사단은 부대를 양평군으로 이전한 뒤 명절마다 지역 참전용사를 방문해 위문품을 전달하는 등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백옹은 “반가운 마음에 현관 앞까지 마중 나갔는데, 사단장님이 ‘왜 그러시냐’고 당황했다”며 “돌아갈 때는 거수경례를 받았는데, 나도 ‘나라를 지켜주고 있음에 감사하다’는 뜻을 담아 허리 숙여 인사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그는 요즘도 매달 한 차례씩 지역 참전용사 회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안부를 묻고 건강상태를 확인한다.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지론에서다. 백옹은 “거동하기 불편한 회원이 많아 조금이라도 건강한 내가 움직이는 게 맞다”며 웃음을 지었다.

또 다른 과업은 6·25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알리는 것. 양평군과 양평교육청의 협조를 받아 6·25전쟁의 역사적 사실과 지역 보훈시설 지도 등을 만들어 학생들의 교육자료로 제공하고 있다.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에서는 전문강사가 해당 자료를 토대로 교육 프로그램도 선보인다.

백옹은 군대 내부에서도 이 같은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미래 우리 군을 이끌 장교들부터 전쟁의 역사와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라를 지켰고, 이제 젊은 세대가 나라를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제대로 배워서 알고 대비하면 다시는 전쟁이라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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