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라오스①
1953년 프랑스서 독립…20여 년 내전
미국은 우파·소련은 좌파 무기 공급
베트남전 엮여 폭탄 209만 톤 떨어져
국립재활원 전시관 전쟁 참혹성 각인
의족 예술 작품 앞에선 관람객들 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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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에게는 낯선 나라였다. 이 나라의 전쟁 역사는 더욱 생소하다. 1953년 10월 22일 라오스는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그러나 20여 년 처절한 내전을 거친 후 1975년 12월에 공산정권으로 재탄생했다. 국토 면적은 23.7만㎢, 인구 730만의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다. 수도는 비엔티안(Vientiane)이며, 연 국민 개인소득은 2700달러다. 라오스 군사력은 현역 2만9100명(육군 2만5600명·공군 3500명)과 10만 명의 민병대가 있다. 전쟁역사박물관은 비엔티안과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에 다수 건립돼 있다.
태국·라오스 국경 ‘우정의 다리’를 건너다
라오스는 북서쪽으로 미얀마, 남으로 태국·캄보디아, 동으로 베트남, 북쪽으로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특히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약 1835㎞의 국경선을 가진 태국과는 10분이면 배로 오갈 수 있다. 국토의 80%가 산악지대로, 강원도와 자연환경이 비슷하다.
비엔티안과 마주 보는 태국의 농카이(Nongkhai) 국경 세관은 출입객들로 혼잡했다. 출국장을 통과하자 국경을 넘나드는 택시기사들이 달려든다. 편안하게 라오스 세관까지 갈 수 있지만, 1500바트(Baht·태국 화폐, 한화 약 5만7000원)를 요구한다. 터무니없는 요금에 대부분의 사람은 35바트(한화 약 1330원) 운임의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메콩강 ‘우정의 다리’ 중간이 국경선이다. 하천 주변 어느 곳에서도 경계병력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다리 중간을 기준으로 양편에 태국·라오스 국기만 펄럭인다. 라오스인은 메콩강을 ‘어머니의 강’으로 부른다. 이 강은 라오스 문명을 탄생시킨 젖줄로 오늘날까지 식수, 농업용수, 영양 공급원으로 무한한 혜택을 주고 있다. 또다시 라오스 세관을 통과해 100달러를 환전하니 무려 167만5000킵(Kip·라오스 화폐 단위)을 건네준다.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지만, 높은 화폐 단위가 혼란스럽다. 이곳에도 비엔티안행 국경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엔티안 박물관과 라오스 전쟁역사
다음 날 이른 새벽, 숙소 주변의 주요 건물을 알아두고자 거리로 나섰다. 인적이 뜸했지만, 노점상들이 식품이나 야채류를 펼쳐 놓는다. 한 무리의 스님이 그들을 위해 축복 기도를 해주고 있다. 라오스인의 90%가 불교도다. 기도가 끝나자, 상인들은 펼쳐 놓은 식품 일부를 답례로 기부한다. 자연스럽게 막내 스님이 헌물 상자를 끌면서 최선임 스님을 따라 다음 상점으로 이동한다.
날이 밝아오자 거리 곳곳에는 춘절(구정) 행사가 요란하다. 붉은 용머리를 매단 트럭에 올라탄 중국인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라오스는 중국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비엔티안에서 라오스 전쟁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은 ‘카이손(공산 라오스 초대 총리)’ 기념관, 군사혁명박물관, 경찰박물관, 국립재활원 전시관, 국립박물관이다. 특히 카이손 기념관은 라오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 그의 일대기와 공산화 과정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베트남전쟁이 바꾼 라오스 현대사
1953년 10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면서 왕립 라오 정부가 세워졌다. 1954년 5월에는 프랑스군이 베트남 디엔 비엔 푸에서 호찌민 군대에 대패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의 반공세력을 위해 본격적으로 라오스에 군사원조를 시작했다. 반공세력과 좌파 파테트라오(Pathet Lao)가 대립하면서 내전이 발발했고, 우파·중도파·좌파의 연쇄 쿠데타로 라오스는 혼란에 빠졌다.
1960년대 내전은 베트남전쟁과 연계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라오스는 중립국이었지만 미국은 우파에게, 소련은 좌파에게 무기를 공급했다. 더구나 북베트남군이 라오스 영토에 ‘호찌민루트’를 개설하자 미군은 이 보급로에 사정없는 폭격을 퍼부었다. 이른바 ‘비밀전쟁(Secret War)’의 시작이었다. 1973년 폭격이 중단될 때까지 하루 평균 177회 공습으로 총 209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파리 평화협정으로 미군은 베트남에 이어 1974년 6월 라오스에서도 완전히 철수했다.
1975년 12월 마침내 좌파 게릴라들이 비엔티안에 입성하면서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수많은 군인·공무원·의사·교사와 4만5000명의 피난민이 태국으로 탈출했다. 공산군에 체포된 왕족과 지식인 4만여 명은 첩첩 산골 정치범 수용소에서 살인적인 사상교육과 노동을 강요당했다. 의료시설조차 없이 식량까지 자급자족해야 하는 생활은 그 자체로 감옥이었다. 수년간의 재교육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연히 카이손 기념관에는 이런 비극의 역사는 감춰져 있다. 인접 국립박물관 전시물 대부분도 공산혁명 찬양 일색이다. 넓은 박물관 야외 정원에는 인류 역사에서 이미 실패로 끝난 공산주의의 상징물 붉은 레닌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국립재활원 전시관과 전쟁의 후유증
1975년 12월 라오스 내전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호찌민루트 주변에는 아직도 수천만 발의 불발탄이 남아있단다. 국립재활원 전시관은 25년간의 전쟁 생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라오스 장애인의 대부분은 불발탄 폭발사고로 팔·다리를 잃었다. 아이들이 그린 폭발물 사고 장면, 다양한 의족을 모은 예술 작품은 관람객들을 숙연한 분위기로 이끈다.
이곳에서는 장애인 재활치료와 병행해서 보조기구를 직접 생산한다. 세계 각국의 지원으로 건립된 장애인 체육관까지 있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에게는 전쟁의 참혹성을 일깨워주는 교육장이다. 전시관을 나오니 한국인 단체 관광객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국립 비엔티안 대학의 한국어 열풍
한 국가의 미래는 신세대 교육에 달려 있다. 라오스 역시 낮은 국민 교육 수준을 끌어올려 인적자원을 개발하고자 전력투구하고 있다. 라오스는 초등 5년, 중학교 3년, 고교 4년, 대학 4년의 학제로 운영된다. 학사 일정은 매년 9월 시작해 이듬해 8월에 끝난다.
시내 외곽에 라오스 최고의 명문 비엔티안 대학교가 있었다. 넓은 부지에 각 단과대학 건물들이 흩어져 있다. 공휴일로 한산한 캠퍼스에 갑자기 한 무리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휴일을 이용한 보강 수업이 있었단다. 국립대학에 대해 질문을 하니 한 여학생이 한국어로 대답한다. 그녀는 바로 옆 건물 ‘세종 학당’에서 1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단다. 이 대학교에는 중국어를 강의하는 ‘공자 학원’도 있지만, 학생들에게는 한국어 수업이 훨씬 인기가 있다며 은근히 필자를 치켜세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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