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러시아⑥
적백내전·대한독립군 강제이송 등
비극의 역사 품은 도시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 혁명 사랑이야기 유명
바이칼호 한민족 시원 설에 한글리본도
|
|
|
러시아 이르쿠츠크는 몽골과 인접한 시베리아 중심도시며 대륙횡단열차가 통과한다. 1661년부터 중국·몽골과의 무역으로 도시 역사가 시작됐으며, 약 62만 명이 거주한다. 제정러시아 당시에는 유배지였지만, 현재는 바이칼호 관광의 배후도시로 유명하다. 지구에서 가장 큰 담수호인 바이칼호의 물이 이르쿠츠크 중심부를 통과해 북극해로 흘러간다. 또 1921년 6월 잔여 독립군이 이곳에서 적군 제5군단의 ‘고려혁명군’으로 편성됐다. 지청천 장군은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을 맡았지만, 1922년 4월 소련 당국이 교육방침을 문제 삼아 그를 체포했다. 그러나 상하이(上海)임시정부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지청천은 석방됐다.
적백내전과 영화 ‘제독의 연인’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다. 도심을 관통하는 안가라강변 주택지는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시내에는 이르쿠츠크국립대를 포함한 명문 학교와 정교회 건물들이 곳곳에 있다. 이곳의 날씨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듯해 휴양도시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1825년 데카브리스트 혁명, 1917년 적백내전, 1921년 대한독립군 강제이송, 1941년 독소전쟁 등 비극의 역사를 품은 도시이기도 하다.
영화 ‘제독의 연인’에 나오는 콜차크 제독이 적군에 처형당한 곳도 바로 이르쿠츠크다. 볼셰비키 공산혁명에 저항하는 백군 총사령관 콜차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백군은 한때 볼가강까지 적군을 몰아붙이며 승세를 굳혔다. 그러나 ‘체코군단’의 배신으로 치명타를 입어 이르쿠츠크로 패퇴했다. 적군에 생포된 콜차크는 1920년 2월 7일 안가라강변에서 처형돼 얼음구덩이로 내팽개쳐졌다. 그가 죽은 후 애인 안나는 공산정권에서 수용소를 오가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훗날 콜차크 부하들이 그의 시신을 안가라강에서 건져 시내의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안장했다. 국민영웅으로 재탄생한 콜차크 제독의 동상은 비극의 현장 안가라강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 수도원 근처에는 제2차 세계대전 전사자 추모불꽃 제단도 있다. 러시아의 중소도시에는 빠지지 않고 이와 같은 전몰장병 추모시설이 있다.
5군단 거리와 데카브리스트 기념관
공산정권이 적백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이르쿠츠크는 적군이 점령했다. 시내에는 ‘5군단 거리’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다. 적군 소속의 제5군단은 내전 간 이 도시에서 큰 공을 세웠다. 자유시참변 이후 잔여 독립군과 지역 한인들로 구성된 2000여 명의 ‘고려혁명군’도 이 부대 소속이었다.
이 도시의 데카브리스트 기념관은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다. 1825년 12월 14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 즉위식장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프랑스 원정에서 서유럽의 의회민주주의를 보고 온 군인들이 정치개혁을 요구한 사건이다. 반란이 진압된 후 106명의 장교가 이르쿠츠크로 유배됐다. 귀족 후예들이 졸지에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중죄인이 된 것이다. 18명의 기혼자 부인은 이혼 후 귀족 신분을 보장받거나 남편과 유형지로 같이 가는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섰다. 놀랍게도 11명의 부인이 시베리아행을 택했다. 뒤늦게 출발한 이들이 남편을 만난 곳은 이르쿠츠크에서도 한참 떨어진 벌목장과 광산이었다. 여자들은 쇠사슬에 묶인 남편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이들은 유형지에서 빨래·청소·설거지로 생계를 유지하며 옥바라지를 했다. 7~9년이 지난 후 죄수들에게 이르쿠츠크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를 되새기려는 듯 유독 청춘남녀들이 기념관에 많이 들르고 있었다.
지구상 가장 큰 담수호 ‘바이칼호’
이르쿠츠크에서 3시간30분 정도 버스로 달리면 바이칼호의 ‘올혼섬’행 선착장에 도착한다. 러시아 시골은 생각보다 열악했다. 호수를 건너는 페리호도 상륙용 주정을 개조한 선박이다. 10여 분 항해 끝에 올혼섬에 다다르자 또다시 소형버스로 비포장도로를 달려 이 섬의 ‘후지르’ 마을에 도착했다.
약 3000만 년 전에 형성된 바이칼호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담수호다. 길이가 640㎞에 달한다. 가장 넓은 곳이 80㎞, 가장 좁은 곳이 27㎞이며 최대 수심이 1637m로 세계에서 가장 깊다. 깊이 40m 물속의 동전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다.
마을에서 가까운 해안에는 신비로운 기운이 왕성하다는 ‘샤만카 바위’가 있다. 해변 언덕에는 알록달록한 오색 리본이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한글로 소원이 적힌 리본이 압도적으로 많다. 전국 각지의 모든 지명이 리본에 망라돼 있다. 바이칼호가 한민족의 시원(始原)이라는 설의 영향도 많았을 것 같다.
러시아군과 바이칼 얼음호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중 가장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바이칼호 노선이다. 그러나 1898년 초기 횡단철도 공사는 바이칼호에서 멈췄다. 주변의 험준한 절벽과 산악을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방편으로 호수 위의 트레인 페리(Train Ferry)로 열차를 실어 날랐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강추위에 트레인 페리도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병력·물자 이동이 급한 러시아는 바이칼 얼음 위에 철로를 놓아 화물열차와 병력이 호수를 횡단토록 했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군인들은 깊은 호수로 빨려들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떨었다.
결국 4월의 바이칼은 열차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기관차와 병사들이 호수 속으로 사라졌고, 일본 언론은 신령스러운 가미카제가 적군을 삼켰다고 대서특필했다. 러시아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전쟁터로의 보급은 중단됐다. 경부선과 경의선으로 만주로 진격한 일본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러시아군에 소나기 펀치를 퍼부었다.
시골 재래시장의 소매치기 사건
바이칼호 주변에는 유람선, 해변 사우나, 호수전망대, 전통공연, 재래시장 등 다양한 관광상품이 있다. 전통공예품과 과일을 주로 파는 재래시장은 크게 붐비지도 않았다. 상인 중 가끔 고려인도 눈에 띈다. 시장 골목을 이리저리 거닐던 중 갑자기 “내 지갑!”이라는 비명이 들렸다. 관광객이 상점에서 높은 곳에 있는 진열품을 향해 팔을 뻗어 만지는 순간, 누군가 잽싸게 핸드백 속 지갑을 빼서 달아났단다. 빠른 손동작에 처음에는 지갑이 없어진 것도 몰랐다고 한다. 한적한 시골이라 도난사고에 방심한 게 문제였다. 소매치기의 고난도 기술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여행경비를 몽땅 털린 그 관광객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외여행 중 도난의 위험성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필자 제공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