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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경제 뉴스에서 익숙했던 반도체가 국방 뉴스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다. 첨단 반도체가 탑재된 무기가 자국민을 지키고, 첨단 반도체가 없는 무기가 민가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반도체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죽고 사는 문제가 된 것이다.
무기의 첨단화는 반도체를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무기 중 하나인 재블린 미사일은 한 대에 350여 개의 반도체가 들어가며, 헬리콥터 CH-53K에는 2000여 개의 반도체가 들어간다. 최신형 전투기에 필수적인 능동위상배열 레이다에는 수천 개의 반도체가 필요하다.
무기 속 반도체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양질의 반도체 확보가 전쟁의 양상과 우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첨단 반도체가 필수인 정밀 유도 미사일을 대규모로 사용하며 초반 기세를 잡았다. 하지만 첨단 무기의 재고 소진과 미국의 대러시아 수출 제재로 인한 반도체 부족 여파로 후퇴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노획한 러시아의 군사 장비를 보면 군사용 반도체가 들어갈 자리에 냉장고나 식기세척기에서 빼낸 반도체로 채워져 있다는 보고가 나왔다. 또한, 반도체 공급 차질로 러시아 탱크 제조업체가 문을 닫았다. 반도체가 국방력을 결정짓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정밀전 이전의 전쟁에서 국가들은 단순히 무기의 수적 우위를 추구했다. 정확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세계 2차 대전 중 미국 공군이 1000피트 내에서 투여한 폭탄의 8%만이 목표에 명중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걸프전에서는 단 한발의 미사일로 정확히 목표를 맞추는 것이 가능해졌다. 바로 반도체 때문이다. 첨단 반도체가 상대보다 전쟁을 더욱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다. ‘산업의 쌀’로 지칭되던 반도체는 이제 군사적 전략자산으로 떠올랐다.
반도체 산업 자체로 국가를 지키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대만이 바로 그러하다. 대만은 미국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파운드리 분야 최강국이다. 미국 상무장관의 말에 따르면, 미국은 군사 장비에 사용되는 첨단 반도체의 70%를 대만에서 수입하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에서 반도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이 대만을 향한 군사적 위협을 보일수록 대만은 이러한 미국의 대만 반도체 의존성을 자신들의 ‘방패’로 활용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반도체를 ‘창’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강력한 대중국 반도체 제재로 인해 기술 굴기와 경제성장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도체를 활용한 정치외교력은 강대국으로부터 자국을 지키는 힘이 되고, 반도체 수출 제재가 군사 행동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는 시대가 도래했다.
반도체는 21세기 석유로 평가받고 있다. 그만큼 강력한 패권을 가져다주는 존재라는 의미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반도체 강국 중 하나다. 하지만, 반도체는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이 아닌 사람이 만든 ‘기술’이라 찰나의 방심으로 그 우위를 잃을 수 있다. 전 세계 극소수의 나라만이 가진 이 새로운 전략자산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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