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나선정벌 나선 조선군, 전사자 7명은 아무르강 언덕에

입력 2023. 02. 22   16:34
업데이트 2023. 02. 2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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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러시아⑤

 
청나라 요청에 조선군 265명 출병
러시아 함선 11척 불태우고 대승
115일 원정 마치고 고국으로 귀환

 

하바롭스크의 아무르강 선착장 전경. 두만강 넘어 출정한 조선군은 1658년 6월 10일 아무르강에 들어서자마자 러시아군을 만났다. 필자 제공
하바롭스크의 아무르강 선착장 전경. 두만강 넘어 출정한 조선군은 1658년 6월 10일 아무르강에 들어서자마자 러시아군을 만났다. 필자 제공

 

러시아군 전몰장병을 기리는 명예의 광장 전경.
러시아군 전몰장병을 기리는 명예의 광장 전경.


러시아 우수리스크 항일유적지 답사를 마친 일행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역 청사에 모였다. 안내인은 밤새도록 달리는 야간열차의 주의사항을 꼼꼼하게 설명한다. “만약 내일 아침 하바롭스크역에 정확하게 내리지 못하면 모스크바까지 가야 할지 모른다. 일주일간 계속 달리는 열차 구간에서 하차역을 놓쳐 여행을 망치는 승객들이 가끔 생긴다. 다음 역에서 기차를 바꿔 거꾸로 다시 돌아오려면 또 하루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바롭스크행 열차에서의 작은 사건

시베리아 횡단열차 노선은 9288㎞에 달하며 지구 둘레의 4분의 1 수준이다. 중간에 내리지 않아도 7일이 걸린다. 러시아 동서를 횡단하는 동안 7번의 시차가 바뀌며 객실은 일등석(2인실), 이등석(4인실), 삼등석(6인실)으로 구분된다.

일등석은 당연히 쾌적한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이등석은 의자를 펼쳐 침대로 사용해야만 한다. 열차 소음에 잠을 청하기 쉽지 않았으나 피곤이 누적돼 이내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같은 객실의 A씨와 맨 뒤 칸 식당차에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종업원이 오믈렛까지 덤으로 갖다 준다. 한참 담소를 나누던 중 갑자기 하바롭스크 도착 방송과 함께 열차가 정차했다. 도착시각 착각으로 느긋하게 식당에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라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급히 객실을 향해 달렸지만 통로는 이미 하차하는 승객들로 꽉 막혀 있었다. 아예 열차에서 하차한 후 승차장을 따라 달려서 겨우 배낭을 찾아 내렸다. 기차가 떠나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명예의 광장과 한인 전사자

하바롭스크는 아무르강(흑룡강)과 우수리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17세기 중반 이곳을 답사한 러시아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을 붙인 인구 65만 명의 도시다. 1858년부터 러시아는 이곳을 바이칼호 동쪽 거점 도시로 개발했다. 하바롭스크에도 한인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시가지를 남북으로 잇는 3㎞ 구간은 ‘김유천 거리’로 불린다. 1929년 중·소 전쟁 당시 소련군 중위로 큰 공을 세운 김유경을 기념한 거리다. 러시아어 표기 잘못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만5000여 명의 한인 중 중앙아시아에서 재이주해 온 고려인 후손들은 러시아말에 능통하다. 고등교육기관이 없는 사할린에서 자녀 교육을 위해 하바롭스크로 이주한 동포도 많다고 한다. 고려인 신세대의 한국어 학습 열기는 뜨겁다. 몇 세대가 흘렀지만 선진국으로 부상한 조상의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신세대 고려인의 가슴에는 살아 있다고 한다.

시내 중심부에는 조국 대전쟁(제2차 세계대전) 전몰장병을 기리는 ‘명예의 광장’이 있다. 극동지역 출신 전사자 2만여 명의 이름이 비각에 새겨져 있고, 24시간 꺼지지 않는 추모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러시아어로 표기된 전사자명비에서 한인으로 추정되는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뒤편 높은 기념탑에는 옛 소련 시절의 노동영웅, 영예훈장 수여자 이름을 별도로 새겨 두고 있었다.

국경선 아무르강 섬 두고 중·러 충돌

하바롭스크를 끼고 도는 아무르강 선착장에서 유람선에 올랐다. 넓은 강폭에 누런 색깔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몽골에서 발원해 오호츠크해까지 2800㎞를 흐르는 아무르강은 부분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이룬다.

하바롭스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랫동안 국경 분쟁을 빚어 온 서울 여의도의 35배 크기인 ‘볼쇼이 우수리스크’ 섬이 있다. 공산주의 형제국끼리 40년을 다퉜다. 국익 앞에서 이념은 뒷전이었다. 역사적으로 청나라는 1858년 아이훈조약에서 한반도 크기의 2배가 넘는 아무르강 이북 45만㎢를 러시아에 내줬다. 1860년 베이징조약에서는 연해주 30만㎢와 신장지구 85만㎢까지 잃었다. 불평등조약으로 많은 영토를 내준 중국으로서는 뿌리 깊은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1969년 3월 우수리강의 섬 영유권을 두고 양국 국경수비대 충돌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서쪽의 신장지구에서도 영토권 문제로 유혈충돌이 잇따랐다. 이 분쟁은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국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해결의 물꼬를 텄고, 2005년 6월 대부분의 국경선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아무르강을 넘어 밀려드는 중국 노동자·상인들로 현재 러시아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고 있다.

조선군과 러시아군의 첫 만남

아무르강을 따라 육로 수송보다 값싼 물류비로 대량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화물선과 바지선이 수시로 운항하고 있다. 아무르강은 우리 역사에서 ‘나선정벌(羅禪征伐)’로 불리는 흑룡강 출병과 인연이 있다. 1658년 3월 청나라는 러시아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군 출병을 요청해 왔다. 당시 조선은 정벌 대상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어슴푸레 서양인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신유 장군이 이끄는 265명의 조선군이 5월 2일 두만강을 넘어 출정했다. 군인들은 우수한 화력을 가진 함경도 포수들이 주력이었다. 6월 10일 조선군이 아무르강에 들어서자마자 러시아군을 만났다. 50여 척의 조·청 연합군은 적 함선 11척을 불태우고 러시아군 270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안타깝게도 조선 군인 7명이 전사했다. 아무르강 옆 높은 언덕 위에 조선군 전사자를 같은 고향끼리 갈라 묻어 줬다. 원정군은 115일이 지난 1658년 8월 27일 마침내 고국으로 귀국했다. 이 정벌로 흑룡강·송화강 유역에서 횡행하던 러시아 세력은 물러갔다.

아무르 강변의 김정일 방문기념 안내판

아무르강 답사를 마치고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강변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 입구에 의외로 북한 김정일의 하바롭스크 방문기념 안내판이 있었다. 2001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위해 러시아 방문 중 김정일이 전망대에 들렀다는 내용이다.

북한은 김정일이 백두산 빨치산 부대에서 출생했다고 왜곡 선전한다. 사실은 하바롭스크 북쪽 뱌트스코예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군 특별독립 제88여단 제1영장이었다. 대대장 직책이었지만 여단 총병력 200명 중 60명 내외를 지휘했다. 현지 부대 막사는 아직도 남아 있으며, 주민들도 여러 차례 김일성에 관련된 증언을 하기도 했다.

하바롭스크 시내에는 ‘마르크스’ ‘레닌’ 등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이름이 많다. 러시아정교회 성당도 곳곳에 있다. 공산혁명과 성당은 서로 적대적인 상징물이다. 반인륜적 공산주의 이념도 선한 길로 인간을 인도하고자 하는 신성한 종교의 가치를 깨뜨릴 수 없었다. 하바롭스크 중앙시장에서는 상인들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상품을 소개한다. 이들의 모습에서 공산주의의 잔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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