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32. 이강성 KLO8240전우회 총연합회 부회장
부모님과 인사 나눌 새도 없이 입대
전쟁 통에 헤어진 후 영영 다시 못 봬
옹진지구전투서 북한군과 생애 첫 교전
기습남침 끈질기게 방어해 적 공격 지연
적군 전력 파괴·요인 암살 등 임무
적진 비상탈출 아군 조종사 7명 구조도
추위와 배고픔 가장 견디기 힘들어
전투 치르고 적 시체 옮기던 중
4인 1조 모두 시체 더미 위서 잠들기도
차라리 죽으면 행복할까 생각
1958년 전역…은행서 42년 근속
인터넷 카페에 전우회·군 행사 사진 공유
전쟁은 참혹
나라 지키는 후배 장병들에게 고마워
목숨 바친 노병 오랫동안 기억해 주길
|
|
|
|
|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변곡점을 함께했다. 6·25전쟁 1·4후퇴 때 이산가족이 되고, 파독광부와 베트남전쟁을 겪으면서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보여 준다. 6·25전쟁 참전영웅들의 삶도 이 못지않게 파란만장하다. 일제강점기, 광복, 6·25전쟁, 산업화 역군….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세월의 혹독함을 이겨 낸 노병이 전하는 이야기, 국방일보 연중기획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서른두 번째 주인공은 이강성(89) KLO8240전우회 총연합회 부회장이다. 글=배지열/사진=양동욱 기자
전쟁에 휘말린 16세 소년, 가족과 생이별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당시 경기도 옹진(현재 황해도 옹진)에 살던 만 16세 소년, 강령농중학교 4학년 이강성 군은 이날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7명의 친구와 38선 일대 까치산에 놀러 갔다가 국군 17연대 군인들을 만난 것.
“교련 수업 때 소총술을 가르쳐 준 군인 아저씨도 있어서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마침 주말이라 함께 다니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았죠. 같이 밥을 지어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다가 잠들었는데, 큰 폭발음이 들려 화들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10대 소년은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참전하게 됐다.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새도 없었다. 전쟁 통에 헤어진 이후로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함께 전장에 뛰어든 친구들도 그날 이후 재회하지 못했다.
“처음 보는 집채 같은 물체에서 포탄이 튀어나오면서 군인들이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두려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겁보다도 적개심이 타올라 더 열심히 싸웠습니다.”
이옹이 생애 처음으로 겪은 옹진지구전투에서는 17연대가 옹진·강령 일대에서 북한군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에 맞섰다. 6·25전쟁에서 북한군과 첫 교전이 벌어진 전투이자 기습남침을 끈질기게 방어해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아군의 성공적인 철수작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틀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철수해 27일 자정 옹진 가막개선창에서 목선을 타고 연평도로 후퇴한 이옹은 국방부에서 설치한 을지제2병단 소속이 됐다. 이 부대는 이후 적 후방에서 첩보활동을 맡은 KLO8240부대로 전환됐다.
이옹은 “주요 임무는 적군 전력 파괴, 요인 암살 등이었다”며 “적진에 비상 탈출한 아군 조종사 7명을 구조했고 피란민을 이동시키는 임무도 맡았다”고 설명했다.
이옹의 삶은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5학년 때 8·15 광복을 맞았고, 중학교 4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정전협정 체결 후에는 11사단 13연대 수색대대를 거쳐 육군훈련소에서 중화기학과 81㎜ 박격포 교관으로 훈련병 교육을 담당했다.
추위, 배고픔, 수면부족 ‘삼중고’ 견디며 전투
그는 생사를 함께하던 전우를 향한 회한도 털어놨다.
“KLO8240부대에 있을 때 당시 황해남도 연백군 해성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적 탄약고를 폭파하라’는 비밀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소대장인 나와 선임하사, 소대원까지 3명이 작전을 수행하고 후퇴하다 선임하사가 공격을 받고 쓰러졌어요. 다급하게 이동하느라 그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습니다. 고(故) 송병옥 선임하사와 유가족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당시 이옹도 이마 왼쪽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지금도 그의 이마와 왼쪽 눈두덩이에는 흉터가 남아 있다.
전장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이옹은 “우리가 주둔한 고지까지 주먹밥이 올라오면 그게 그렇게 기뻤다”며 “얼마나 추웠던지 그새 밥이 얼어 한입 베어 물면 잇자국이 허옇게 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물을 마실 수 있는 장소도 제한돼 필사적으로 목마름을 참아내야 했다.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으려고 수통을 갖다 대놓고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 맛이 소태처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 번은 도랑에 물이 고여 있길래 반가운 마음에 엎드려서 벌컥벌컥 마셨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북한군 시체가 쌓여 있는 곳에서 흘러나온 물이었습니다.”
이옹과 전우들은 언제, 어디서 적의 공격을 받을지 몰라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로 인해 편하게 잠을 잘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전투를 치르고 4인 1조로 적 시체를 옮기던 중이었는데, 4명이 동시에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체 더미 위에서 자고 있더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나중에는 물자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전사자 물품을 쓰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한 번은 신발이 없어 전사한 북한군이 신고 있던 걸 벗겼는데, 문드러진 살점이 신발 안에 남아 있어 꺾은 소나무 가지와 흙을 넣어 씻은 후 신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할 만큼 전쟁은 10대 소년에게 가혹한 기억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너무 배고프고 힘들어 ‘빨리 죽으면 차라리 행복할까’라는 마음이 든 적도 있습니다. 전장에서 다쳐 후송되는 전우를 보고 부러운 감정이 들기도 했죠. 이 정도면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파괴하고 체력적·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드는지 알지 않겠습니까.”
목숨 바쳐 나라 지킨 노병들 기억해 주길
1958년 일등중사로 군복을 벗은 그는 대한적십자사를 거쳐 1970년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한 뒤 42년 동안 근속했다. 그때 매주 토요일마다 배웠던 사진 촬영은 지금도 그의 취미활동이다.
이옹은 은행에 근무하면서 익힌 컴퓨터 기술을 활용해 인터넷 카페에 자신의 일상뿐 아니라 전우회 또는 군 관련 행사 사진을 올려 공유한다. 특히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사진을 남긴다.
전우들을 위한 활동도 활발하다. 그는 유격군전우회 총연합회와 KLO8240전우회 총연합회 부회장직을 8년 전부터 맡고 있다. 20년 전 창립 과정에 힘을 보탠 국군 17연대 전사자기념사업회에서도 초대 부회장에 이어 3년 전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옹은 나라를 이끌어 갈 미래 세대에게 진심 어린 한마디를 전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전쟁은 정말 참혹합니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보태세를 굳건히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를 지키느라 고생하는 후배 장병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큽니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발전된 대한민국이 있도록 6·25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노병들을 오랫동안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