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한인 강제이주…피눈물 나는 개척의 역사를 쓰다

입력 2023. 02. 15   17:07
업데이트 2023. 02. 1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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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러시아④

 
고려인 호칭, 나라 잃은 약소국의 산물
연해주 한인들 여러 나라로 강제 이주
끈질긴 저력으로 개척…벼농사 전파도

 
1917년 러시아 첫 한인 중앙총회 조직
고달픈 타향살이 속 조국의 독립 열망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 선생 발자취도

 

한인 강제이주자들이 화물열차에 타는 모습.
한인 강제이주자들이 화물열차에 타는 모습.

 

강제이주 한인 최초 거주지의 기념 비석.
강제이주 한인 최초 거주지의 기념 비석.

 

한인 강제이주가 최초로 시작된 라즈돌노예역 전경.
한인 강제이주가 최초로 시작된 라즈돌노예역 전경.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고택 전경.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고택 전경.

 

한인 대표들의 중앙총회가 개최된 우수리스크 실업학교 전경.
한인 대표들의 중앙총회가 개최된 우수리스크 실업학교 전경.


우수리스크와 가까운 시골에 라즈돌노예역이 있다. 이 역은 1937년 9월부터 3개월간 연해주 한인들의 강제이주 출발점이었다. 경찰이 한인마을을 포위한 가운데 한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소나 돼지처럼 끌려 나와 역 앞에 집결했다. 한겨울 추위 속에 목적지도 모른 채 40일간의 기차 수송 끝에 도착한 곳은 6000㎞ 떨어진 중앙아시아 허허벌판. 17만2000명의 한인은 피눈물 나는 개척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만 했다.

동족으로서의 고려인 자부심

한국은 중국, 이스라엘,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해외 교포를 많이 가진 나라다. 이는 수난의 한국 역사와도 많은 연관이 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한인이 해외로 이주했다. 통상 만주 이주자를 조선족, 연해주 이주자를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스탈린은 연해주 한인들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으로 다시 강제이주를 시켰다.

고려인이라는 호칭은 나라 잃은 약소국의 현실과 한반도 분단이 낳은 비극적인 역사의 산물이다.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 19만 명, 카자흐스탄 10만 명, 모스크바·연해주·사할린에 각 4만 명 등 총 55만 명에 이른다. 한국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8만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조선족이 비켜난 가장 힘든 일을 맡는다. 동포이긴 하나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대부분 한국인이 같은 핏줄의 동족이라는 사실에 강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우수리스크 항일 유적지와 최재형 고택

1917년 5월 21일, 최초로 러시아지역 한인 대표 100명이 우수리스크에 모여 한인 중앙총회(고려국민회)를 조직했다. 이어 1918년 6월, 제2차 중앙총회가 시내에 있는 실업학교에서 개최됐다. 건물 안내문은 항일운동의 역사를 이렇게 기록했다.

‘이 건물은 전로 한인대표회의가 개최돼 민족 자치와 독립운동을 결의한 장소다. 1919년 3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전로 한인 중앙총회는 임시정부 조직인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됐다.’

고달픈 타향살이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열망했던 선조들의 애국심이 서려 있는 유적이다. 최재형 고택도 이 유적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큰 가뭄이 들자, 아버지는 9살 아들의 손을 잡고 러시아 지신허로 이주했다. 최재형은 형수의 구박과 배고픔을 못 이겨 가출하면서, 그의 운명을 바꿔준 러시아 선장을 만났다. 선장은 총명한 그를 양아들로 삼고 6년간 선원으로 해외 견문을 넓히도록 했다.

이후 최재형은 러시아 해군 군납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는 소학교를 세워 한인들을 교육했고, 독립운동 단체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 4월 상하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재형은 재무총장으로 추대됐다. 하지만 1920년 4월 5일,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처형당하면서 60세에 생을 마감했다. 고택 맞은 편 시민공원에는 발해 유물로 추정되는 거북이 형상의 비좌가 있다. 역사 분쟁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러시아 정부는 아예 거북이 등 위의 비석을 제거했다고 한다.

연해주 한인 강제이주 생존자 증언

우수리스크 문화센터에 전시된 강제이주 자료 중 생존자의 증언이다.

“소련은 집단 이주에 앞서 한인 지도자급 인사 2500명을 사전에 검거해 은밀하게 처형했다. 한인들은 자신의 농토와 집·가축 등 모든 재산을 버려야만 했다. 옷가지만 챙겨 들고 탄 콩나물시루 같은 열차는 악취가 진동했다. 화물칸 널빤지 사이로 들어온 찬바람은 살을 에는 것 같았다. 대소변을 보고자 정차 중에 내린 부녀자 중, 예고 없는 열차 출발로 시베리아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동서남북 분간이 어려운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토굴을 파고 추위를 피했다. 숱한 한인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봄이 되자 수로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해 논을 일구었다. ‘굶어 죽어도 종자벼는 베고 죽는다’라는 속담대로 숨겨온 볍씨를 뿌렸다. 다행히 땅은 비옥해 첫해 추수 후에 식량은 마련할 수 있었다. 한민족의 끈질긴 생활력과 우수한 벼농사 기법은 전 러시아에 알려졌고, 정부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도 많았다.”

소련 해체 이후, 1993년 러시아 의회는 지난 잘못을 인정하고 고려인 명예회복법을 채택했다. 이로써 고려인은 다시 연해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장고봉 격전지에서 본 두만강

버스가 힘겹게 올라간 장고봉 정상에는 소련군 승전기념탑이 있었다. 고지 주변의 벙커 일부는 무너져 내려 있고, 교통호는 흔적만 남아 있다. 눈 아래 펼쳐진 넓은 평원의 끝이 두만강이란다. 바로 이곳이 85년 전 일본과 소련이 격돌한 장고봉 전투 현장이다. 한반도 주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숱한 전쟁의 역사가 이처럼 숨어 있다.

1932년 3월, 중국 북쪽에는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제국이 들어섰다. 1938년 7월, 두만강 북쪽 만주국과 소련 사이 해발 150m의 장고봉이 있었다. 불분명한 국경선상의 이 야산을 일본군 19사단이 7월 29일 공격을 개시해 점령했다. 이에 소련은 1개 군단을 동원해 일본군을 격퇴하면서, 8월 11일 휴전회담으로 전투는 끝났다. 내심 소련군을 경멸해 왔던 일본군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최신 기계화 전술에 둔감했던 일본군은 1939년 5월 몽골 국경 지역의 노몬한 전투에서도 더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일본군 병사들은 소련군 장갑차를 총검술로 맞서야만 했다. 한국 영화 ‘마이 웨이(My Way)’에 노몬한 전투 장면이 잘 묘사돼 있다. 일본군은 3명의 연대장이 전사했고, 1만7000명의 사상자를 남겼다. 발전하는 과학기술력을 무시하고 정신 무장만을 강조했던 일본군의 한계였다.

발해 성터에서 느낀 선조의 숨결

우수리스크에서 교외로 약 15분 자동차를 타고 가서, 수이푼강 부근의 발해 토성에 도착했다. 현장에는 안내판 하나 없고, 주변은 광활한 황무지만 펼쳐져 있다. 토성은 높이 5m 내외이며,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성벽조차도 잡초에 파묻혀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성 밖의 수이푼강은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좋은 자연장애물이다. 이곳이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며 위풍당당하게 대륙과 바다를 누볐던 발해(AD 698~926년)의 군사기지이며 민초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발해 땅이 러시아 연해주까지 뻗어 있었음이 유적으로 입증됐지만, 유적 대부분은 역사 속에 묻혀 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는 가느다란 샛길만 보인다. 지금은 민가조차 없는 버려진 성터지만, 어디선가 1000여 년 전 발해 군사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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