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우수리스크에 서린 애국혼…독립운동 발자취 곳곳에

입력 2023. 02. 08   16:45
업데이트 2023. 02. 0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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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러시아③ 


인구 20만 명 중 고려인 2만 명 거주
연해주 유일 고려인 문화센터 위치

 
자유시 참변·日 한인 학살 등 역사 현장
이상설 선생 유허비 등 유적지에 뭉클

이상설 선생 유허비와 한국인 답사단 모습.
이상설 선생 유허비와 한국인 답사단 모습.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문화센터 전경.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문화센터 전경.

 

독립군이 와해된 자유시 참변 현장의 급수탑.
독립군이 와해된 자유시 참변 현장의 급수탑.


복잡하지 않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분위기는 방문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항구와 바다를 쳐다보며 해변에서 느긋하게 망중한을 즐기는 관광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오가는 시민들과 흥정하며 물건을 파는 재래시장은 한국 시골장과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100여 년 전 블라디보스토크는 적백내전의 와중에 일본·미국·영국·이탈리아·프랑스·중국·루마니아·폴란드·체코 등 서방 열강들이 치열한 국익 다툼을 했던 역사적인 도시였다. 그 가운데서 나라 뺏긴 한인들은 흡사 어미 잃은 송아지 떼처럼 그저 울부짖기만 했다.


고려인의 연해주 재이주 사연

채소와 반찬거리를 파는 50대의 고려인 여성은 7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단다. 같은 피부색에 언어까지 통하니 금방 친근해진다. 타슈켄트보다 이곳 물가가 비싸 어려움이 있다면서 극동연방대학에 다니는 아들의 등록금 마련도 쉽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 부흥, 취업 및 교육기회 제한, 고향에 대한 향수, 한국과의 근접성 등의 이유로 많은 고려인이 연해주로 재이주한단다.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한국도 과거 한인들이 겪은 고통의 세월을 보듬어 주는 차원에서 이들에게 더욱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더구나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 기업의 현지 인재 충원도 고려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고려인 문화센터의 항일투쟁 전시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10㎞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인구 20만 명 중 고려인이 약 2만 명이다. 아침부터 버스로 이동했지만, 항일 유적지와 일·소전쟁 격전지에 들르다 보니 저녁 무렵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고려인들이 많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인 방문이 빈번한 도시이다. 연해주 유일의 고려인 문화센터는 한국 정부가 지원해 2009년에 완공됐다. 넓은 부지에 역사전시관을 포함해 강의실, 체육관, 식당, 숙소, 진료실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 해마다 많은 한국 학생이 이곳에 머무르며 봉사 활동을 한다고 한다. 1층 입구의 역사관은 고구려·발해 역사, 청·러 국경 재설정, 연해주 이주 과정, 안중근 의사, 스보보드니(자유시) 참변,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특히 자유시 참변의 독립군 소멸 과정 전시물은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사건으로 만주·연해주의 항일무장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자유시 참변과 대한독립군 와해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이 끝난 후, 일본군 추격을 따돌린 독립군 3500명은 중·러 국경 부근 밀산(密山)에 집결했다. 보급의 한계로 지칠 대로 지친 독립군은 ‘약소민족 해방’을 내세우는 공산주의자의 달콤한 유혹에 러시아령 자유시로 발길을 옮겼다. 당시 이범석 장군은 공산주의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적백내전이 끝나가자, 소련공산당은 독립군 무장해제와 부대 개편을 요구했다. 이에 찬성파와 반대파로 내부는 분열됐다. 1921년 6월 28일 새벽, 적군(赤軍)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독립군은 전사 272명, 익사 34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의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던 많은 독립군이 근처 제야강을 건너면서 익사했다. 잔여 병력은 바이칼 근처 이르쿠츠크로 이송돼 ‘고려혁명군’ 이름으로 적군 제5군단에 편입됐다. 생존 포로 500여 명은 시베리아 벌목장으로 끌려갔고, 50명은 징역형에 처해졌다. 대한독립군은 어이없이 이렇게 소멸됐다. 이후 조직적인 무장투쟁은 사라졌고, 상해임시정부는 공산주의자와의 연합을 두 번 다시 시도하지 않았다. 만약 자유시 참변이 없었다면, 만주사변·중일전쟁에서 독립군은 대규모의 광복군으로 재탄생해 끝까지 투쟁했을 것이다. 이런 피의 대가로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한국도 당당히 승전국 반열에 오를 수도 있었다.


수이푼 강변의 이상설 유허비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 근처에 이상설 선생 유허비가 있다. 연해주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들르는 항일 유적지다. 어제 단지동맹비에서 본 교장 선생님 단체를 다시 만났다. 해외여행에서 2번, 3번 다시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관심 분야가 비슷하다. 이구동성으로 ‘헤이그 밀사 사건’을 재인식하게 됐다고 했다.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과 외교권 박탈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고종의 밀사 이상설·이준·이위종이 회의장에 들어섰다. 그러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쫓겨났다. 미·영·러·일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대한제국에 관심을 가져주는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이준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숨을 거뒀고, 7월 18일 고종은 강제 퇴위당했다. 이듬해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됐다. 1917년 48세 나이로 요절한 이상설의 유해는 화장돼 수이푼 강물에 뿌려졌다. 조국 해방을 위한 애국 충절의 이상설 유허비 글귀가 답사단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일본군 바이칼 진격과 한인 학살

1917년 러시아의 공산혁명이 성공하자, 백군(白軍) 지원을 명분으로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했다. 내심으로는 한인 독립운동과 빨치산 제거로 광대한 러시아 영토를 확보하자는 목적이었다. 1918년 4월, 일본 육군 제 3·7·12사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이미 러·일전쟁 경험이 있는 일본군의 진격은 거침이 없었다. 수천 ㎞ 떨어진 바이칼호 인근 이르쿠츠크까지 일장기를 휘날리며 진출했다.

미국 9000명, 영국·이탈리아·프랑스가 1000~1500여 명을 파병한 데 비해 일본군 병력은 무려 7만3000명에 달했다. 1922년 백군이 패배하자 다른 연합군은 철수했지만, 일본군은 11월 적군(赤軍)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사할린을 점령한 일본군은 1925년 5월경 철수했다. 일본군은 불순세력 소탕을 명분으로 연해주 한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사전 철저하게 계획된 군사작전이었다. 적·백군, 일본군, 연합군, 마적떼 등 온갖 군대가 연해주를 휘젓고 다녔지만, 아무도 한인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 자국 이익을 위해 대한독립군을 이용하거나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우수리스크에는 이런 역사를 증언하는 4월 참변추도비, 최재형 집터, 전러 한인중앙총회 개최지 등 다양한 독립유적지가 남아 있다. 우수리스크 공원에서 작은 조랑말 한 마리를 묶어두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러시아 여성을 만났다. 유창한 영어로 노새를 타고 공원을 산책하는 이벤트를 소개하지만, 여행객 반응은 시큰둥하다. 상당한 지적 수준을 갖춘 여성이 노새 옆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오늘날의 러시아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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