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안중근 등 12명, 손가락 끊어 ‘대한독립’ 맹세하다

입력 2023. 01. 25   15:45
업데이트 2023. 01. 2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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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러시아 ② 


항일운동 치열했던 연해주의 한인들
일제강점기·구소련 체제서 비극의 역사
재산 몽땅 빼앗기거나 강제 이주 당해
단지동맹 기념비 한국인 많이 찾아

 

연해주 단지동맹 기념 유적지 전경.
연해주 단지동맹 기념 유적지 전경.

 

우수리스크에 있는 4월 참변 기념비.
우수리스크에 있는 4월 참변 기념비.

 

1930년대 축성한 루스키 섬 해안요새 포대 입구 전경.
1930년대 축성한 루스키 섬 해안요새 포대 입구 전경.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극동의 최대 도시다.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방항로의 종점이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출발점이다. 1856년 러시아인이 이곳을 발견한 후, 항구와 도시 건설이 시작됐다. 시베리아 철도(1891~1916)가 개통되면서 모스크바와의 교통망이 이어졌다. 1918년 봄부터 1922년까지는 공산혁명 진압을 위해 미국·일본·체코 등의 외국 군대가 이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연합군으로부터 전쟁물자를 지원받는 보급기지였다. 숙소에서 만난 한국 여행객 일부는 ‘별로 볼 것 없는 도시’라고 푸념한다. 한민족과 얽힌 이곳 역사에 약간의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무역·관광도시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형 백화점이나 쇼핑센터를 보기 힘들다. 외국인을 위한 면세품 상점도 창고형 건물에서 주류, 식품 등 생필품 위주로 판매한다. 일반 시장에서 거래되는 쌀·감자·채소류는 대부분 중국산이다. 태평양을 끼고 있는 항구라는 특성으로 시베리아산 꿀, 캘리포니아산 건포도, 호주산 분말 우유도 쉽게 볼 수 있다. 연해주에서는 한국산 TV·오디오 등 가전제품의 인기가 높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면서 성능도 우수하단다.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이 개방되면서 한국·중국·일본 등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과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모스크바 쪽보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교역 조건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무역과 물류 거점에 이어 관광도시로도 떠오르는 이곳에는 1990년 한·소 수교 이후 한국 총영사관과 무역관이 설치됐다. 특히 2012년 APEC 정상회담 이후, 한국 기업들의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다. 호텔이나 시내에서 만나는 단체여행객 대부분은 한국인들이었다.


연해주 한인들의 치열한 항일운동


러시아 연해주는 국내외에 걸쳐 항일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다. 안중근·홍범도가 의병장이 돼 두만강 유역에서 투쟁했고, 재러 동포들은 이들을 지원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크게 고취했다. 강인한 한민족의 후예들은 낯선 땅 연해주에서 집을 짓고 학교를 세우고 언 땅을 개간해 옥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물심양면 모든 것을 바쳤다. 1919년 3월 17일, 국내외에서 최초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라는 정부를 조직했다. 그 후 만주와 국내 독립단체와 연계해서 항일운동을 추진하던 중, 이 조직은 상해임시정부와 통합했다. 그러나 재러 동포의 활발한 항일투쟁은 1920년 4월, 일본군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한인 거주지에 대한 습격으로 일시 정체 상태에 빠졌다. 우수리스크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인 최재형이 일본군에 의해 처형당하기도 했다.


비극으로 점철된 연해주 한인 역사


일제강점기와 구소련 체제에서의 한인 역사는 비극으로 점철됐다. 신한촌 기념비는 조국 없는 백성들의 수난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자, 한인들은 졸지에 국적 없는 망국인이 됐다. 일부는 러시아에 귀화했지만, 조국 해방을 기다리며 끝까지 무국적자로 남은 한인들도 많았다. 특유의 개척정신과 성실성으로 사회적 차별을 극복하고, 경제적 부(富)를 축적한 한인도 많았다.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혁명의 열기에 싸여 있었다. 공산혁명은 성공했지만, 이 도시는 적백 내전의 최전선이었다. 한인 다수는 식민지 해방을 공언하는 적군의 편에 섰다. 백군을 지원하는 일본군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1920년 4월 5일 새벽 4시, 일본군이 신한촌의 한민학교에 주둔한 적군을 기습 공격했다. 일본군은 한인들을 끌어내어 벤젠을 뿌려둔 학교 건물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러시아 신문 ‘크라스노예즈나미아’는 그 참상을 이렇게 보도했다. “마당과 큰 거리에는 주검이 산을 이뤘고, 가축도 많이 쓰러졌다. 신한촌에는 온전한 집이 하나도 없으니 그 참혹한 광경을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었다”라고.


뒤이어 소련 정권은 악착스럽게 모은 한인들의 사유재산을 ‘평등’의 명분으로 몽땅 빼앗았다. 숨 막히는 공산체제에서 이들에게 또 다른 비극이 닥쳐왔다. 1937년 10월, 스탈린이 일본으로부터 극동을 지켜낸다는 명목으로 한인들의 강제 이주가 단행됐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들의 손을 잡은 한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시베리아행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한인은 무려 17만2000명. 질곡의 역사 속으로 내팽개쳐진 약소민족에게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중근 의사와 단지동맹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만강 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수 시간을 달려 안중근의 단지동맹 유적지에 도착했다. 넓은 평원 위의 기념비 주변에는 한국 교장 선생님들의 단체 답사단이 이미 와 있었다. 연해주 독립유적지 중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단지동맹 기념비는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형상화했고, 12명의 혁명동지를 상징하는 돌비석이 있다. 1909년 2월 7일 연해주에서의 단지동맹 결성에 대한 안중근의 자서전 내용이다. 


“우리가 국권을 잃은 후, 아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 몸과 마음을 나라를 위해 바칠 것을 모두 손가락을 끊어 맹세합시다. 주저 없이 열두 사람이 왼손 약지를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글자 넉 자를 크게 쓰니 ‘대한독립’이었다.”


단지동맹은 1914년 8월 23일 자 연해주 한인단체 권업회의 기관지인 ‘권업신문’에 게재돼 한인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루스키 섬의 러시아 해안포대 유적


블라디보스토크 건너편에는 50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루스키 섬이 있다. 군항의 방파제 역할을 하면서도, 적의 접근을 미리 탐지할 수 있는 전초기지이기도 하다. 바다의 풍광을 보며 걷는 트레킹 코스로 유명하지만, 주변 곳곳에는 해안포대 유적도 많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1934년에 축성됐다. 출입이 허용된 캄캄한 포상 내부로 들어가니 천장에는 박쥐가 붙어 있다. 바다를 향하고 있는 거대한 해안포도 일부 남아 있다. 90년 세월이 흘렀지만 엄체호 두께, 포상 넓이를 고려 시 유사시에는 재사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섬에는 세계 100대 명문대학에 속한다는 극동연방대학교도 있다. 여행객은 정문에서 사진 촬영만 가능하고 교내 출입은 제한된다. 2012년 APEC 정상회담을 이곳에서 마친 후, 시내에 있었던 이 대학이 이전해 왔단다. 현재 한국의 33개 대학에서 교환학생을 보내고 있으며, 북한 학생들도 다수가 재학 중이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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