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러시아 ①
이순신 장군 첫 부임지인 녹둔도
청·러조약에 어이없이 러시아로 편입
집터·경작지 등 조선인 거주 흔적 뚜렷
1863년 한인들 연해주로 첫 이주
황무지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촌 생겨
강제 이주된 신한촌 옛터엔 기념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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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지금은 남의 땅이지만,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운 곳이다. 또한, 선조들이 일제에 맞서 독립 투쟁을 벌인 주무대이기도 하다. 이곳에 살던 많은 한인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황량한 들판에 버려진 이들은 토굴을 파서 추위를 피하고, 황무지를 개간했다. 숱한 이주민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지만, 벼농사를 전파했고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자, 일부 이주 한인들이 타향살이의 설움을 씻고 다시 연해주로 귀향했다. 만주와 연해주의 광활한 땅은 수천 년에 걸쳐 우리 민족의 삶터였다. 그 땅은 끊임없이 우리의 귀소본능을 자극한다. 이번 러시아 편은 연해주와 바이칼 지역의 전쟁 역사를 조명하고자 한다.
변방 연해주의 러시아 국경 세관
중국 훈춘의 국경 세관을 통과하면 바로 건너편에 러시아 세관이 있다. 허름한 건물 속의 근무자 태도는 느긋하다. 여권 검사가 끝났지만,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중앙정부와 수천 ㎞ 떨어진 변방 연해주의 낙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권총으로 무장하고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오가는 여성 세관원에게 지루하다는 자세를 보여도 소가 닭 쳐다보듯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1시간 이상을 세관에서 머문 버스가 드디어 자루비노항으로 출발했다.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가 있다. 군사지역으로 선포된 이 지역에 민가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인적 없는 넓은 초원과 구릉은 그대로 방치돼 있다. 대규모 개간을 통해 농산물을 생산하려 해도 값싼 중국산에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단다. 공단 조성 역시 배후도시 건설이나 물류 인프라 고려 시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첫 부임지이며 선조들이 애써 가꾸어 온 녹둔도가 어이없이 러시아에 넘겨진 것은 부끄러운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청·러 국경조약과 조선의 녹둔도
녹둔도는 32㎢ 크기로 서울 여의도의 4배 정도다. 조선 시대 다양한 기록물은 녹둔도를 경작지이자 변방 거점으로 묘사한다. 1587년 여진족이 대거 침공해 왔을 때, 만호 이순신은 사력을 다해 이 땅을 지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녹둔도는 두만강 범람으로 러시아 연해주와 이어졌다.
1860년 러시아가 아편전쟁 중재를 구실로 청나라를 압박하면서 베이징 국경조약을 체결했다. 어이없게도 청나라는 남의 땅 녹둔도를 러시아에 넘겨버렸다. 조선 정부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청·러 조약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선인의 녹둔도·연해주 이주는 계속됐다. 대한제국이 뒤늦게 러시아에 녹둔도 반환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묵살당했다. 1885년에 118가구 822명의 조선인이 이 섬에 거주했다. 러시아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최근 확인된 녹둔도 토성 안쪽에는 경작지로 사용한 밭이랑이 뚜렷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주인 잃은 집터와 연자방아, 가마솥, 항아리 파편이 곳곳에 있단다. 녹둔도는 러시아에 빼앗겼지만, 엄연히 그곳은 우리 선조들의 땅이었다.
신천지를 찾아온 연해주의 조선인
1800년대 중반 조선에서는 반복되는 흉년과 관리의 수탈로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1863년에는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가난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처음 이주했다. 러시아도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곳을 개척하기 위해 한인 이주를 허용하는 동시에 토지까지 제공했다.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 해안가 개척리에는 한인촌이 생겼다. 하지만, 1911년 콜레라 창궐을 구실로 도시 서북쪽의 신한촌으로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그 자리에 러시아 기병단이 들어섰다. 한인 이주는 해마다 증가해 1882년에 1만 명, 1908년에 5만 명, 1926년에는 20만여 명에 달했다.
1999년 3·1운동 80주년이 되는 해에 신한촌 기념비가 옛터 부근에 건립됐다. 세 개의 돌비석은 한국·북한·고려인을 의미한단다. 이곳 유적지는 자기 할아버지의 고향이 평양이라는 고려인이 관리하고 있다. 주변에는 ‘서울 거리’까지 있었지만, 100여 년 전 선조들의 삶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 역사
블라디보스토크 여행객들이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 해발 240m의 독수리전망대다. 서울의 남산처럼 시내와 항구를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다. 군항을 외해에서 방어하는 루스키섬을 연결하는 해상교량과 정박 중인 군함도 눈 아래 보인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 이전에는 외국인은 물론 러시아인도 출입이 통제될 정도로 폐쇄적인 도시였다. 넓은 영토를 가진 러시아는 19세기 중반까지 태평양지역의 연해주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1891년 3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블라디보스토크 착공식에 황태자 니콜라이가 참석하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됐다. 1916년 모스크바까지 9300㎞의 대륙횡단 철도가 완공됐고, 항구도 확장됐다. 1882년 철도 부설 계획을 세울 때까지 연해주의 러시아인은 8400여 명에 불과했다. 1908년 철도가 부분 개통되자 38만 명이 됐다. 공사가 완전히 끝나자, 러시아인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완전히 연해주를 장악했다. 이런 과정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적백내전,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군항으로 부상했다.
군항 블라디보스토크의 군사유적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러일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다양한 군사 유적이 산재해 있다. 루스키섬 해안포대, 요새박물관, 중앙(혁명)광장의 전몰장병 기념비와 추모 불꽃, 잠수함박물관 등이 대표적인 유적지다. 특히 중앙광장은 1937년 10월, 강제이주를 위한 고려인들의 집합장소이기도 했다. 연해주 곳곳에 건립된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 명비에서 ‘Kim(김), Ri(이), Park(박)’ 등 한국인 성씨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소련군으로 징집된 한인들의 후예로 추정된다. 러시아 대학에 유학 준비 중인 안내인 K씨는 이 도시의 서민 생활을 이렇게 소개했다.
“현지인들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다. 교사들도 적은 월급으로 생활이 어려워 대부분 정부에서 허용한 과외수업을 병행한다. 많은 청년이 급여 수준이 더 높은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난다.”
오늘날에도 러시아에서 유행하는 우스개 이야기다. 스탈린 시대 빵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길게 섰던 시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일부 시민이 스탈린을 죽이러 가겠다고 하니, 옆 사람이 만류하면서 “그곳 줄이 훨씬 더 길어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스탈린이 통치한 1922년부터 1953년 사이 처형당한 국민이 무려 4500만 명. 공산 독재 70년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오늘날 후손들이 짊어지고 있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6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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