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영화

무모한 전술의 끝은 비극일 수 밖에…

입력 2022. 10. 05   17:11
업데이트 2022. 10. 0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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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1981)
감독: 피터 위어
출연: 멜 깁슨, 마크 리
 
1차 대전, 처칠이 계획했던 작전
이스탄불 정복 위한 무모한 전투
호주 청년들의 우정과 비극 그려
 
불리한 지형 속 무리한 진격 명령
불과 수백m 전진을 위해
수천 명 희생했던 상황 사실적 묘사
 

영화 ‘갈리폴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전투에 참여했던 호주 청년을 기리는 진혼곡이다. 영화 ‘갈리폴리’ 장면들.  사진=배급사
영화 ‘갈리폴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전투에 참여했던 호주 청년을 기리는 진혼곡이다. 영화 ‘갈리폴리’ 장면들. 사진=배급사
‘모즐리의 법칙’으로 노벨상 수상이 유력시되던 헨리 모즐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해 갈리폴리 전투에서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사진=위키피디아
‘모즐리의 법칙’으로 노벨상 수상이 유력시되던 헨리 모즐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해 갈리폴리 전투에서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사진=위키피디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겠다. 다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우리가 죽을 즈음 다른 부대와 지휘관들이 우리의 임무를 대신할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앤드루 망고 지음, 애플미디어 펴냄)


‘처칠의 굴욕’ 갈리폴리 전투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다르다넬스 해협은 지중해에서 육지로 둘러싸인 마르마라해로 이어지는 60㎞ 길이의 물길로, 가장 좁은 곳은 폭이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해협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투의 무대였다. 1915년 1월 영국 해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해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처칠은 낭만적인 전략가이자 열정적인 모험가였다. 그는 이스탄불을 차지한다면 흑해를 통해 러시아군에 군수품을 지원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연합군은 독일의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고, 러시아는 배후 걱정 없이 전군을 독일 전선에 투입할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독일은 홀로 양쪽 전선에서 힘겨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처칠의 생각이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안목이 탁월한 ‘처칠 정도 되는 인물’만이 그려낼 수 있는 전략이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무스타파 케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실수만 빼면.

1915년 3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려는 해군의 단독 작전은 오스만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영국 함대 총사령관인 피셔 제독은 처칠의 무모한 전술에 항의하며 사퇴했고, 처칠도 패전 책임을 지고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났다. ‘2주 안에 이스탄불을 점령하겠다’는 호언장담은 두고두고 처칠의 굴욕으로 남았다.

갈리폴리 전투는 4월부터 육군의 상륙작전으로 확대됐다. 더 큰 참사의 시작이었다. 3월 22일 해전 패배로부터 실제 공격 날짜인 4월 25일 사이의 한 달 동안 놀라운 임시변통이 이루어졌다. 가장 즉흥적인 것은 계획 자체였다. 오스만군의 배치에 관한 확실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어디로 상륙해야 저항을 가장 적게 받고 가장 크게 이로울 것인지 추정에 따라 계획을 수립했다. 원정군 정보부는 오스만군의 전력과 작전 계획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공격 지역의 지도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았다.

4월 25일 영국군은 갈리폴리 반도 남단의 헬레스 곶에, 호주·뉴질랜드군으로 구성된 앤잭 부대(ANZAC·Australia and New Zealand Army Corps)는 북쪽으로 약 24㎞ 떨어진 두 곳에 7만5000명의 병력이 상륙했다. 상륙 부대가 무사히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곧 드러났다. 오스만군은 거의 없었다. 그처럼 불리한 지점으로 상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갈리폴리 전투 당시 연합군은 상륙한 해안에서 거의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고지대에서 아래를 향해 갈겨대는 오스만군의 대포와 기관총 세례에 병사들이 무참하게 죽어 나가고 있었다. 1916년 1월, 마지막 부대가 철수할 때까지 연합군은 55만 명이 넘는 병력을 투입했다.

연합군 사상자는 25만 명에 달했으며 3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오스만군도 최대 25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어느 병사의 죽음’ 오마주

영화 ‘갈리폴리’(1981)는 1차 대전에 참전한 호주 청년의 우정과 비극적 최후를 그린 작품이다. 멜 깁슨은 이 영화로 연기력을 인정받아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었다.

평소 ‘전쟁 영웅’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던 아치(마크 리)는 전쟁에 뛰어든다. 우연히 육상 대회에 참가해 아치와 우정을 쌓은 프랭크(멜 깁슨)는 아치를 따라간다. 파병된 곳에서 처음엔 두 주인공은 즐거운 나날을 보내지만, 이들에게도 전쟁의 참상이 찾아온다. 참호 밖을 나간 병사들은 오스만군의 기관총 소리와 함께 1m도 채 전진하지 못한 채 쓰러지고 이 둘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달리며 비극을 맞는데….

불리한 지형에도 병사들의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살 행위와 같은 진격 명령을 계속 내리는 지휘부 때문에 실제 전투에서 불과 수백m를 전진하기 위해 수천 명이 사망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영화는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정지 화면으로 잡은 마크 리의 마지막 장면은 피터 위어 감독이 1938년 스페인 내전에서 세계적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가 찍은 전설적 사진 ‘어느 병사의 죽음’을 오마주한 것이다. 스무 살도 안 된 청년들의 무모한 죽음 위로 흐르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선율은 귓가에 오래 남아 있다.


1차 대전서 전사한 영국 과학자 모즐리…이공계 대체복무제도의 시작


20세기 초 노벨상 수상 유력했지만
갈리폴리 상륙작전 최전선서 사망
과학계 호소에 영국 대체복무 시행


“수헬리베 붕탄질산….” 학창시절에 외우느라 골치깨나 썩었던 원소 주기율표(periodic table)를 기억하는가. 러시아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에 의해 처음 고안된 주기율표는 오늘날 화학을 쉽게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이정표가 됐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훌륭했지만, 현재 사용하는 주기율표와는 차이가 있었다.

1913년 영국 물리학자 헨리 모즐리는 주기율표를 원자번호로 재정렬하면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서 생겼던 문제점을 해결했다. 이런 결과는 그가 X선을 연구한 덕분이었다.

모즐리는 방사선에 관한 연구로 1908년도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원자핵의 존재를 발견해 원자핵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연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제자였다.

모즐리는 X선 파장과 원자번호 사이의 일정한 관계, 즉 파장의 제곱근이 원자번호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른바 ‘모즐리의 법칙’으로 원자 구조론 및 원자핵물리학 분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런데 모즐리가 한창 중요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을 무렵 1차 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은 운명을 바꿨다. 그는 한 학회에 참석한 후 연구실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자원입대했다. 주변 사람들은 만류했지만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결심을 막을 수 없었다. 후방 근무도 사양했다.

모즐리는 1915년 갈리폴리 상륙작전에 공병대 통신장교로 최전선에 나섰다가 오스만군 저격병의 총에 맞았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과학계는 충격에 빠졌다. 훌륭한 제자를 전쟁으로 잃은 러더퍼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여러 활동을 이어갔다. 과학 인재들을 군대에 보내는 대신 계속 연구를 시키는 게 국가에 더 이익이 된다고 호소하고 설득에 나선 것.

결국, 영국 의회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고 이후 다른 국가에도 확산됐다.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이공계 대체복무제도는 뜻밖에도 20세기 초반에 노벨상 수상이 유력시되던 한 젊은 과학자의 안타까운 죽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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