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과학의 역사에서 만나는 전쟁이야기

유럽 근대과학 자리 잡은 17세기 후반부터 학회 중심 과학자 사회 형성

입력 2022. 08. 19   17:03
업데이트 2022. 08. 2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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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역사에서 만나는 전쟁이야기 - 과학단체의 태동과 발전

1660년 설립 영국 왕립학회
1666년 창립 프랑스 왕립과학아카데미
현재에도 전통 이어 명성 유지
미터법 포함 도량형 통일 개혁 독보적
군 기술병과 전문간부 육성에도 관여



오늘날 과학자나 공학자들은 대부분 연구 결과들을 혼자 간직하지 않는다.

국방과학기술 분야처럼 비밀리에 연구를 추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연구 결과는 논문 출판이나 공개 발표를 통해 공식적인 연구 실적으로 인정받는다.

과학기술 지식이 생산되고 공식적으로 수집·공개되는 과정은 매우 체계적으로 제도화돼 있다. 대학과 기업체 연구소를 통하는 경우도 있지만 통상 같은 분야 연구자들의 집단인 학회나 아카데미 또는 협회 등의 학술단체들이 그 중심에 있다. 대부분 학술단체는 전문학술지(Journal)를 발간하고 우수 논문과 연구자를 발탁·시상하거나 세미나와 콘퍼런스 등을 통해 학술정보와 지식 교류의 장을 제공해 연구자 간 네트워크의 허브 역할을 담당한다.

이처럼 과학자들이 단체를 만들어 집단적 연구 활동을 시작한 것은 유럽에 새로운 근대과학이 자리 잡은 17세기 후반부터였다.

당시는 대학이나 산업체 연구소들이 출현하기 전이라 과학자들은 주로 학회를 중심으로 과학자 사회를 형성했다.

그 원조로는 1660년 설립된 영국의 ‘왕립학회’와 1666년 창립된 프랑스의 ‘왕립과학아카데미’가 손꼽힌다. 이 학회들은 현재까지도 명문 학회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후 이를 모방해 전 유럽에서 과학학회와 아카데미들이 활발히 설립되면서 학회들 간의 다국적 연구 네트워크가 활성화돼 국제 과학자 사회가 형성될 수 있었다.

유럽 근대과학혁명의 중심이던 영국과 프랑스에서 과학과 과학자 사회의 발전 모습이 달랐던 것처럼 두 학회 역시 다른 모습으로 성장했다.

영국 왕립학회는 당시 최고 과학자였던 로버트 보일(1627~1691)이나 로버트 훅(1635~1703) 등 공화파 과학자들이 모여 찰스 2세의 공식적 인가를 받아 출범했다.

그러나 왕립학회는 왕실의 실질적·체계적 후원을 받지 못했고 국가 운영에 직접 참여하지도 못했다. 물론 아이작 뉴턴(1642~1727)같이 당대 최고 과학자들이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아마추어들도 섞여 있어 느슨한 지식 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최고 학술지로 인정받는 『철학회보』를 간행하고 강연과 발표회를 개최하며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는 왕립학회와 매우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갔다. 회원 자격을 정예 과학자로 엄격히 국한했고 매우 체계적·조직적으로 과학 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당시 루이 14세의 오른팔이었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1619~1683) 재무장관의 지원 덕분이었다. 그는 강력한 왕권 정립을 위해 관료제를 도입하고 과학과 학문 분야에서도 프랑스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는 국가기관을 설립해 국정 운영에 활용하려 했다.



과학자들 국정 자문·공적 임무 담당 

덕분에 과학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은 일종의 공무원으로서 국정 자문과 공적 임무를 담당하며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고 왕립도서관과 동·식물원, 천문대 등 당대 최고의 시설과 건물을 마음껏 활용했다.

이를 통해 18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과학은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왕정에 봉사하는 반혁명 왕당파로 낙인찍혀 잠시 폐쇄됐다가 부활하는 등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이때도 혁명정부는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을 근대국가 건설과 국정 운영의 주요 도구로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라부아지에를 다룬 지난 글에도 소개하였듯이 특히 혁명기부터 공화정을 거쳐 나폴레옹 시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자들이 전문 직업인으로서 국정 운영과 군대 경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미터법을 포함한 도량형의 통일과 개혁은 현대 과학기술사에서 프랑스의 독보적 위상을 지켜주는 대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권력 집단에게는 통치 영역을 표시하고 곡식·물자 등의 세금을 거두는 일이 중요했다. 따라서 길이와 부피, 무게의 기본 단위인 도량형의 표준화와 통일이 필수적이었다. 중국 진시황은 척관법을 도입했고 이집트 등 고대국가들도 모두 자체적인 단위로 도량형을 통일하고자 했으며 영국은 1215년 대헌장에 길이(인치와 야드), 부피(파인트), 그리고 무게(파운드)의 도량형 단위를 명시했다.

오늘날 도량형 표준인 MKS 체계의 기본단위인 미터(M), 킬로그램(K), 초(S)는 18세기 후반부터 근대 수학과 과학을 바탕으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과학자들이 이룩한 과학사적 업적이다. 가장 기본은 길이인데, m를 길이 단위로 지정한 미터법은 프랑스혁명기 아카데미 과학자들이 중심이 돼 제정했다. 물론 현재는 프랑스 미터법이 폐지되고 빛의 파장을 기초로 1m를 정하고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국가나 지역마다 서로 다른 도량형 단위를 쓰는 상황이었고, 이는 근대적인 국가시스템 확립에 큰 걸림돌이 됐다.

이미 루이 16세가 과학아카데미에 도량형 개혁의 임무를 부여했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기를 거쳐 완성됐다.

도량형 통일 과정에는 뉴턴 물리학 법칙이 맞냐, 틀리냐를 둘러싼 과학계의 이슈와 논쟁이 기여한 바가 크다. 18세기 후반 뉴턴 과학이 유럽에서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뉴턴의 물리학 법칙을 적용했을 때 예상되는 지구의 모습과 둘레(자오선)에 대해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뉴턴 반대파들은 지구의 모습을 원형이나 위·아래로 길쭉한 타원이라고 주장했고, 찬성파들은 자전에 의한 구심력 때문에 적도 부분이 불룩 튀어나온, 옆으로 길쭉한 타원이라며 대치했다.



해외 여러 곳에 지구 둘레 재는 측량대 파견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재정지원을 풍부하게 받던 프랑스 과학아카데미가 해외 여러 곳에 지구 모양과 둘레를 재는 측량대를 파견했다. 1735년 라 콩다민이 페루원정대를 이끌었고, 1740년 모페르튀가 이끄는 스웨덴의 라플란드 조사대가 파견됐다. 최종 측량 결과 지구는 럭비공과 같은 타원형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뉴턴의 법칙이 명실상부하게 ‘참’으로 판명되면서 뉴턴 과학에 대한 의심은 깨끗이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도량형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한 혁명정부는 이를 과학아카데미 과학자들에게 일임했다. 이에 따라 1791년부터 라그랑주(1736~1813)를 위원장으로 해 라부와지에(1743~1794), 쿨롱(1736~1806), 라플라스(1749~1827) 등 당대 최고의 프랑스 과학자·수학자들로 도량형위원회가 구성됐다.

이 위원회에서는 기본 단위를 정량화하는 방식으로 그때까지도 혼용되던 12진법과 10진법 중에서 10진법을 통일해 확정했다. 또한 이전의 지구 둘레 측량 관측 수치를 이용하고, 측량기준선을 프랑스 파리를 지나는 경도의 적도부터 북극까지의 거리로 정해서 마침내 1795년 지구 자오선 둘레의 1000만 분의 1을 ‘1미터’로 지정하게 됐다.

위원회는 길이의 단위를 기준으로 면적은 길이 단위의 제곱, 부피는 세제곱으로 지정했으며 질량 단위는 최대밀도인 3.98℃에서 단위 부피에 들어가는 순수 물의 질량인 1g으로 정하고 시간의 단위인 초는 평균 태양일의 8만6400분의 1로 정했다. 정확한 측량작업이 마무리돼 1m 길이가 확정되고 백금으로 만든 미터 표준 원기(原器)가 만들어져 프랑스 전역 16군데에 설치됐다(현재 파리에 2군데가 남아 있다). 이후 도량형 단위를 표준화한 프랑스의 ‘미터법’은 1799년 제정됐으나 바로 세계 공통이 되지는 못했고, 최종 채택까지 어려움을 겪다 1875년 비로소 전 세계의 ‘미터조약’으로 공인됐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기 과학아카데미 과학자들은 근대 수리과학의 기초이자 근대국가 운영의 기본 도구인 도량형 통일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전문관료로서 국정 운영과 군대 육성에 깊게 관여했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당시 전 유럽과 전쟁을 벌이던 혁명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1794년 기술병과를 이끄는 전문간부 육성 임무를 맡은 에콜폴리테크닉을 설립하고 발전시키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에콜폴리테크닉을 위시한 군사기술학교들이 프랑스 군대의 강력한 힘과 전통을 만드는 데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국의 군대를 키우는 데 어떻게 과학자들을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필자 박영욱 (사)한국국방기술학회 이사장은 서양과학기술사를 전공한 뒤 20여 년간 국방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로 활동하며 한국 대표 글로벌 싱크탱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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