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사선 넘고 넘어… 박정환 소위, 프놈펜 교도소서 생환

입력 2022. 07. 29   15:10
업데이트 2022. 07. 2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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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 79. 캄보디아
태권도 교관으로 베트남전 파병
1968년 공산군 구정 공세 때 포로로
베트콩 변신 제자 도움으로 총살 면해
감시병 때려눕히고 탈출했지만
캄보디아 민병대에 간첩죄로 체포


프놈펜 교도소에 갇혀 온갖 고초
동료편 메모로 호주대사관에 구명 호소
협상 끝에 ‘지옥의 터널’ 빠져나와
피골 상접한 채 김포공항 통해 귀국
국방일보 등 국내 언론 대대적 보도


독립기념탑(가운데)이 있는 프놈펜 시내 중심부 전경. 필자 제공
독립기념탑(가운데)이 있는 프놈펜 시내 중심부 전경. 필자 제공
프놈펜시 외곽 보행로의 노점상 모습. 필자 제공
프놈펜시 외곽 보행로의 노점상 모습. 필자 제공
프놈펜시서 12㎞ 떨어져 있는 교도소 정문. 필자 제공
프놈펜시서 12㎞ 떨어져 있는 교도소 정문. 필자 제공
박정환 소위와 C씨의 생환 기사가 실린 1969년 6월 19일 자 국방일보(옛 전우신문) 1면.  국방일보 DB
박정환 소위와 C씨의 생환 기사가 실린 1969년 6월 19일 자 국방일보(옛 전우신문) 1면. 국방일보 DB

캄보디아는 1953년 독립 이후 중립노선을 취하면서도 북한과 외교적으로 가까웠다. 1970년 한국은 친서방 크메르공화국과 최초 수교했으나 1975년 캄보디아의 공산화로 양국 외교는 단절됐다. 1997년 재수교 이후 현재 캄보디아의 한국 교민은 약 1만2000명(2019년 기준)에 이른다. 이에 비해 매년 3000~4000명이 입국하는 캄보디아인은 한국에 4만1400명(2020년 기준)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1969년 프놈펜 교도소에 한국군 박정환 소위가 1년 3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주캄보디아 호주대사관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출된 역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생환기 『느시』(문예당 펴냄)에 나오는 프놈펜 교외의 당시 교도소와 호주대사관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한국 군인이 갇혔던 교도소를 찾아서


프놈펜 중심부는 어느 나라 도시 못지않게 깨끗하고 정돈돼 있다.

호텔 앞에는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툭툭이(오토바이를 개조한 차량)와 오토바이 부대가 줄지어 있다. 코로나19 영향에 호텔 식당도 폐쇄될 정도로 외국인을 보기는 힘들다. 한가롭게 수다를 떨고 있는 운전기사 쉼터 주변을 기웃거리니 순식간에 서너 명이 달려온다. 넉넉한 몸매에 큰 눈망울을 가진 아저씨 롬과 툭툭이 일일 계약을 했다. 호텔 지배인 누온은 1969년 당시의 프놈펜 교도소 위치를 인터넷 검색과 지인들을 통해 확인해 줬다. 12㎞ 정도 떨어진 시 외곽의 교도소는 『느시』에서 언급하고 있는 위치와 비슷했고, 인근의 불교 사찰도 그대로 남아 있다. 툭툭이 기사에게 지도를 보여 주니 찾아갈 수 있다고 한다.


베트콩 포로가 된 한국군 장교

1967년 10월 15일, 학군사관 4기로 임관한 박 소위는 태권도 교관으로 베트남전에 파병됐다. 경북대 수의대를 졸업한 그는 태권도 공인 5단으로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기도 했다. 박 소위는 사이공(호찌민) 서남쪽 80㎞ 떨어진 미토시의 남베트남군 7사단에 부임했다. 군부대와 학교에 순식간에 번진 태권도 열풍으로 박 소위는 최고의 존칭 ‘야우셔(교수) 박!’으로 불리는 유명인사가 됐다. 그러나 1968년 1월 31일 공산군의 구정 공세 때 불행하게도 그는 베트콩 포로가 됐다.

붙잡힌 남베트남군들은 현장에서 즉결 처형됐지만, 박 소위와 한국인 기술자 C씨는 총살 직전에 살아남았다. 태권도 수제자 ‘후이’가 베트콩으로 변신해 나타난 것이다.

그는 구정 휴가로 부대를 떠나 고향에 갔다가 공산군에 합류했지만, 태권도 덕목인 ‘예의·의리’와 박 소위의 따듯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처형을 고집하는 동료들을 겨우 설득해 박 소위의 목숨을 구했다. 하노이로 끌려가는 지옥의 행군 중 계속되는 구타·굶주림·북송 회유로 박 소위는 만신창이가 됐다.

달콤한 공산주의 전향 요구에 한국에서 자신을 기다릴 홀어머니와 다섯 동생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거부했다.

포로 생활 석 달 후, 그는 감시병 4명을 일거에 때려눕히고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캄보디아 민병대에 체포돼 간첩죄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열악한 수형 생활로 사경을 헤매다가 한국인의 교도소 수감을 알게 된 우방국 호주대사관에 의해 구출됐다. 1969년 6월 18일, 502일의 억류 생활을 끝내고 박 소위와 C씨는 김포공항으로 생환했다. 영양실조에 시력은 망가졌고, 고막파열·피부병으로 피골이 상접한 귀환포로가 나타나자 당시 언론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불사신’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최악의 상황’,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프놈펜 교도소 감방 안 벽은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졌고, 구멍 속에는 빈대가 득실거렸다. 1000여 명의 수감자 중 군인 출신은 100명에 불과했고, 베트남전쟁으로 국경을 넘은 중국·태국·라오스·베트남인 등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었다. 박 소위는 석방을 앞둔 남베트남군 ‘꺼’ 소위에게 ‘한국인 2명이 억류돼 있음’을 우방국 대사관에 알리는 메모지를 전해 줬다. 거액의 사례금 약속까지 했지만, 발각 시 재수감의 두려움에 떠는 그는 확답을 주지 않고 교도소를 떠났다.

영양실조로 박 소위의 시력은 바로 앞 물체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그에게서 태권도를 배운 동료들이 절망에 빠진 그를 정성껏 보살폈다.

어느 날 흉악범으로 20년형을 받은 조폭 출신 ‘마케이’가 결투를 신청했다. 유도를 배운 그는 교도소의 일인자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전 죄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의 대결이 벌어졌다. 쇠약해진 박 소위의 몰골을 얕잡아 보고 덤벼든 그는 돌려차기에 정통으로 명치를 가격당해 숨도 못 쉬고 데굴데굴 굴렀다.

의식을 겨우 회복한 ‘마케이’는 “단 일격으로 끝낼 수 있는데도 몇 번이고 대결을 피했던 네 인품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박 소위의 가장 큰 두려움은 프놈펜 북한대사관을 통해 평양으로 강제 북송되는 것이었다.


우방국 군인을 구출한 호주대사관

1969년 6월, ‘꺼’ 소위가 호주대사관에 전해 준 메모는 즉시 한국 정부에 통보됐다. 호주대사와 미 중앙정보국(CIA) 대표가 대신 캄보디아 정부와 협상했다.

6월 16일, 마침내 박 소위와 C씨는 긴 지옥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렵게 찾아간 프놈펜 교도소에서 54년 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오래전부터 현 위치에 교도소가 있었고, 프놈펜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는 사실만 확인해 줬다. 다시 발길을 옮겨 시내 중심부의 메콩강 옆 호주대사관으로 이동했다. 웅장한 건물의 긴 울타리 외곽을 보안요원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멀지 않은 거리의 한국대사관을 통해 확인한 결과 1969년 당시의 교도소와 호주대사관은 모두 새로운 부지로 이전했다고 한다.


상류층이 즐기는 프놈펜 저녁축구

캄보디아의 한낮 더위는 그나마 오후 3시쯤 정확하게 쏟아지는 20여 분의 스콜이 잠시 식혀 준다. 밤에도 더운 열기가 지면에서 후끈 솟아오른다.

가까운 학교 운동장에서 야간 축구경기가 한창이었다. 밝은 불빛이 비치는 인조잔디에서 운동하는 ‘저녁축구회’ 회장 마카라는 치과의사였다.

학술세미나로 서울에서 열흘간 체류한 경험이 있는 그는 한국의 높은 치과의료 수준을 극찬한다.

축구광인 그의 말에 의하면 더운 날씨로 캄보디아인들은 조명시설을 갖춘 운동장에서 야간 축구경기를 할 수밖에 없단다.

결국 비싼 시설 이용료로 인해 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시민들만이 축구를 즐긴다. 현재 운동하는 회원의 상당수가 의사·변호사라고 귀띔한다.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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