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백과 R&D이야기 K9 자주포

[K9 31회] K9이 제때 완성되지 못했다면?

신인호

입력 2022. 06. 07   08:24
업데이트 2022. 06. 13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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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중동부전선에 최초 야전배치되었을 당시 육군2포병여단 K9자주포 대대가 사격진지를 향해 기동하고 있다. 국방일보DB.
2002년 중동부전선에 최초 야전배치되었을 당시 육군2포병여단 K9자주포 대대가 사격진지를 향해 기동하고 있다. 국방일보DB.


1998년 10월12일, XK9 신형 155㎜ 자주곡사포는 합동참모본부 무기체계심의회에서 ‘전투사용가(可)’ 판정을 받음과 동시에 시제품을 의미하는 X(experimental)를 떼어내고 ‘155㎜ 자주곡사포 K9’으로 명명됐다. 사용군이 획득하는 표준품으로 위상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연구개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K9이 야전에 배치될 수 있도록 전력화를 위한 후속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연구개발진은 1997년 7월부터 국방과학연구소 내부적으로 전력화 추진팀을 구성하고 있었다. 


송기천·유재봉 선임연구원이 중심이 돼 국방부·국방품질관리소·업체 등 관련기관과 K9의 규격화를 시작했으며 김석재·채재욱 선임연구원 등은 명칭과 재고번호를 부여해 보급·운용이 가능케 하는 목록화를 국방조달본부와 함께 진행하고 있었다. 


"규격화는 제품생산에 필요한 자료입니다. 규격화 추진팀은 이것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전투사용가’ 판정이 나자 바로 그날 규격제정 건의서를 작성, 국방부에 제출했습니다. 전력화 시기를 고려할 때 하루라도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유재봉 선임연구원)


규격제정은 1998년 10월29일 국방부 군수품표준화심의회(규격심의)에서 심의위원들의 동의를 얻어 통과됐다. 당시 심의위원장은 국방부 획득개발관 이원형(육사26기·국방품질관리소장 역임)장군이었다. 그는 이렇게 규격제정을 선포했다. 


"70년대부터 국과연이 우리의 무기체계 개발을 위해 10년 이상 노력한 결과 이번에 개발자들이 진정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했습니다. 다소 미비한 면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관련기관과 부서는 우리 무기라는 애착을 갖고 보완·생산해 좋은 무기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합시다. 그동안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연구개발진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이의가 없으면 곡사포·중간형·자주식 155㎜·K9건의 규격이 통과됐습니다."


연구개발진은 양산과 품질보증에 필요한 기술자료를 국방품질관리소에 통보했다. 또 양산계약에 필요한 조달 관련자료도 조달본부에 통보했다. 이어 1998년 12월11일 국과연 연구진은 창원에 위치한 기동시험장에서 국방부·합참·육군·관련업체 관계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K9 개발완료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조달본부가 12월22일 체계조립업체인 삼성테크윈과 1999~2000년에 배치할 155㎜ 자주포 K9의 물량에 대한 생산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연구개발진은 개발 초기에 약속한 전력화 시기를 지켰다. 국과연이 주도한 신형 155㎜ 자주곡사포 연구개발사업 10여 년의 대장정은 계획된 일정을 9일 앞두고 막을 내린 것이다. 


1999년에 들어 국과연 연구진은 생산업체에 초도생산과정과 국방품질관리소의 품질보증활동을 위해 기술지원을 해나갔다. 5월에 국과연이 국방개혁 5개년 계획에 부응하는 국방과학기술 연구개발의 구심체 역할로 첨단기술개발과 정보화를 구현하기 위해 조직을 개편했다. 조직 개편에 따라 자주포부는 자주포팀 2개 팀이 1개팀으로 축소됐다. 자주포부장에 김평수 책임연구원, 자주포팀장에 김현배 책임연구원이 보임됐다.


그런데 꽃게잡이철로 들어선 6월, 서해상에 전례 없는 긴장이 고조됐다. 이른바 연평해전이 벌어진 것이다. 연평도 근해의 북방한계선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과 우리 해군 간의 밀고 밀치는 공방이 거듭됐다. 


마침내 15일 오전 북한 경비정·어뢰정이 북방한계선 2.5㎞ 지점까지 침범하면서 또다시 우리 해군의 고속정과 충돌을 빚었다. 수세에 몰린 북한 경비정이 25㎜ 기관포로 선제사격을 가해 오면서 14분간 진행된 치열한 교전 결과 우리 해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 연평해전에서 패배한 북한 군부는 천배만배의 보복을 공언하면서 함포·해안포 실사격훈련, 기계화부대 기동훈련·공군훈련을 강화하는 등 보복 준비에 절치부심했다. 


연평해전은 종료됐으나 이 해역에서의 군사적 대결상태는 은연중 계속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군 수뇌부는 육군이 획득하려던 K9 자주포를 해군(해병대)으로 전환배치할 것을 결정했다. 


지상화력장비인 자주포가 크지도 않은 섬에서 어떤 효용이 있을까. 연평도에서 북한의 해주까지는 약 32㎞. K9의 최대 사거리 40㎞의 의미는 여기서 곧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동시험장 부장으로 있으면서 기동시험을 수행해 K9과는 친숙한 상황에서 자주포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마침 서해상에 긴장이 고조된 상황이어서 초도생산이 잘되고 최초 배치부대에서 운용이 가능토록 전력화에 최선을 다했습니다."(김평수 사업책임자) 


국과연은 K9이 연평도에 최초 배치되는 점을 고려해 포대운용 적합성을 세밀히 검토하는 등 적극적인 기술지원을 폈다. 그해 말 최초로 생산된 K9은 많은 사람의 관심 속에 삼성테크윈 공장에서 출고식 행사를 가진 뒤 해군 상륙함에 실려 첫 배치됐다. 


그즈음 국과연 자주포체계팀 안충호 책임연구원과 삼성테크윈 해외영업팀 이호구 부장에게는 K9을 해외에 널리 홍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K9의 해외용 명칭으로 천둥이라는 뜻의 선더(Thunder)를 붙이고 포병분야에 국제적인 지명도가 높은 크리스토퍼 포스(Christopher F. Foss)기자에게 해외홍보용 자료를 보냈다. 


"K9이 무기체계로 선정된 후 국제 방산 관련 잡지·신문들이 K9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잘못된 부분, 특히 K9이 국제적으로 신뢰성을 받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국제사회에 당당히 한국이 독자적으로 개발했다는 것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안충호 책임연구원) 


포스 기자는 권위 있는 영국의 군사전문지 ‘International Defense Review’ 2000년 3월호에 한국이 실전배치한 K9 자주포 기사를 실었다. 한국군이 배치한 52구경장 자주포는 아시아 최초이고, 세계적으로는 독일이 1998년 배치한 PzH2000 자주포에 이어 두 번째라며 K9 자주포의 발사 장면과 함께 실었다. 


기사는 K9 개발에 10년이 걸렸으며 선행 및 실용개발과정에서 1만8000㎞의 주행시험과 함께 1만2000발의 사격이 수행돼 신뢰성이 입증됐다는 등 개발과정·성능을 4쪽에 걸쳐 소개함으로써 무기체계에 관심있는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이는 국제적으로 K9 자주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무기시장 진출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2010년 11월 북한이 서해 연평도로 포격 도발을 해오자 즉각 대응에 나선 해병대연평부대 K9자주포. 사진=해병대
2010년 11월 북한이 서해 연평도로 포격 도발을 해오자 즉각 대응에 나선 해병대연평부대 K9자주포. 사진=해병대


‘新자주포’ 사업이 제때에 완수되지 못하고 사업기간이 연장됐다면 어찌되었을까.


1998년 10월 개발을 성공리에 마치지 못했다면 그해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의 영향을 받아 고가장비인 K9의 전력화를 위한 양산 결정이 계획대로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 독일의 기술지원을 받아 자국의 자주포 개발을 추진하던 터키 육군에 개발상 문제가 생긴 시점이 바로 1998년 말이었다. 이때 K9 개발이 끝나지 않았다면 터키가 제3국의 파트너를 찾을 때 한국의 우선순위는 훨씬 떨어졌을 것이며 어쩌면 실제 수출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연평해전 이후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K9을 유효 적절하게 활용할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K9의 우수성에 대한 공인은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신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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