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백과 R&D이야기 K9 자주포

[K9 30회] 안타까운 사고...개발 성공으로 승화

신인호

입력 2022. 06. 07   08:04
업데이트 2022. 06. 0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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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진지를 향해 기동하고 있는 K9과 K10탄약운반장갑차(가운데). 국방일보DB.
사격진지를 향해 기동하고 있는 K9과 K10탄약운반장갑차(가운데). 국방일보DB.


1997년 12월5일 오후 2시, 안흥종합시험장 신자포 전용사격시험장. 날씨는 비교적 따뜻한 편이었다. 모두가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나누며 시험에 나섰지만 이날이 신자포 개발 전 기간을 통해 가장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날로 기억될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실용시제 1호기는 오전에 최대발사속도 기술시험 32발을 포함, 총사격 424발을 완수한 후 포신을 바다로 향한 채 공역이 해제(해상과 공중으로 사격해도 가능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그 옛날 대륙을 질주하던 고구려 기마병을 연상케 했다.


오후 2시30분. 안전통제실로부터 사격을 준비하라는 연락이 왔다. 최대발사속도 시험을 하기 위해 18발의 비활성 포탄과 단위장약 3호를 자주포 내부에 실었다.


그리고 선행시제 개발 및 시험평가 때부터 팀워크를 다져온 포반장 국과연 강신천 선임연구원, 사수 삼성테크윈 정동수 대리, 부사수 국과연 조기호 기술원, 탄약수 삼성테크윈 안병철 대리가 차례로 탑승했다. 이들은 그동안 사격 때마다 장비의 이상 유무 판단과 점검을 완벽에 가깝게 수행해왔다. 


오후 2시47분. 안흥종합시험장 사격통제원인 김태인 기술원의 통제에 따라 첫 발이 발사되고 9초 후 2번탄이 발사됐다. 3번탄이 덜컹하고 장전되고 이어 단위장약이 장전됐다. 그런데 발사 시간이 지나도 사격이 되지 않았다. 느낌이란 순간적으로 와 닿는 것인지 방호벽 뒤에 대기 중이던 연구개발진에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곧바로 신자포를 향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 신자포 후문에 약간의 불빛이 비쳤다. 


삼성테크윈 박승근 과장이 소화기를 들고 뛰어갈 때 작은 불꽃은 점점 거세져 신자포 뒷문으로 불길이 뻗쳐올랐다. 내부 뒷문에 가까이 있던 안병철 대리가 제일 먼저 탈출해 망연히 신자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사수 조기술원은 등에 불이 붙은 채 탈출, 땅에 몸을 굴렸다. 세 번째로 나온 강신천 선임연구원은 손등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불은 자주포 내에서 계속 타고 있었고, 사수석에 앉았던 정동수 대리가 잠시 후 화염을 뚫고 나왔는데,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어요. 사람의 정신력이란 게 대단한 것이 그 상황에서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다른 사람들은 다친 데 없느냐’고 묻고는 고통으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그와 제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삼성테크윈 박승근 과장) 


환자는 비상 연락을 받고 출동한 삼성테크윈 운항사업부 헬기 편으로 삼성서울병원으로 급히 후송됐다. 강신천 선임연구원은 2도 화상, 조기호 기술원은 3도 화상을 입고 3개월 간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연구개발진 모두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정동수 대리는 약 한 달 후 34세의 나이에 부인과 어린 아들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화재사고 후의 K9자주포 시제 내부와 故정동수 대리. 사진=국방과학연구소/삼성테크윈
화재사고 후의 K9자주포 시제 내부와 故정동수 대리. 사진=국방과학연구소/삼성테크윈


"장례식 날 정대리 무덤 앞에서 모두 서로 껴안고 울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서로 말은 안했지만 정대리가 함께했던 신자포 개발은 꼭 우리 손으로 성공시켜 먼저 간 정대리의 몫을 다해야 한다고 각자 다짐했을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이렇게 해냈습니다."(삼성테크윈 한삼수 전 공장장) 


신형자주포의 화재사고 과정은 이러했다. 포탄과 단위장약 3호가 차례로 장전됐다. 그런데 포신의 폐쇄기가 닫히지 않았는데 적치대의 포탄이 이송기로 옮겨지면서 포탄 위치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게 놓였다. 


포반장 강신천 선임연구원이 사격중지 명령을 내리고 이송기의 포탄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 이때 바로 직전에 발사된 2번탄 장약이 완전히 연소되지 않은 채 포신 안에 작은 불씨로 남아 3번탄으로 장전된 단위장약에 옮겨 붙어 포미 쪽으로 화염이 나왔다. 그리고 이 화염이 자주포 내부에 놓여 있던 단위장약으로 번지면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 비상보안실 정경동 실장을 위원장으로 한 10명의 화재사고 조사위원회는 단위장약이 완전 연소되지 않고 남아 있던 작은 불씨, 추진장약 장전에 이어 폐쇄기를 닫아야 하는 안전조치 미흡이 화재 원인으로 결론 내렸다. 


화재 원인이 규명되자 국과연은 안전조치에 미흡했던 사격통제 책임관에게 연구소 차원에서 징계조치했다. 또 김종규 박사를 비롯한 13명의 장비 복구팀은 3개월 내에 장비 복구 계획과 단위장약에 대해서도 불씨가 남지 않도록 개선 방안을 수립했다. 


그러나 사고 여파는 사업기간 연장 검토로 이어졌다. 실용개발로 계획된 2년의 기간 중 남아 있는 1년 안에 사고와 관련한 분야를 보완하고 또 계획된 시험일정과 사업종결 처리 등의 일을 감안하면 6개월 내지 1년 정도의 사업기간 연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두고 연장해야 한다는 의견과 계획된 기간 내에 끝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기도 했다. 


바둑에서는 장고 끝에 악수가 나온다고 하지만 사업책임자 김종규 부장은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합된 의견과 김박사의 결론은 군과의 전력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정동수 대리의 희생을 ‘개발 성공’이라는 값진 결실로 승화하는 것만이 연구진이 해야 할 과제라는 주장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같은 연구개발진의 의욕은 군에도 전해졌다. 실용시험평가는 군이 주도적으로 수행토록 돼 있어 시험평가 기관이 ‘운용시험을 모든 안전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유보한다’고 결정해도 연구진으로서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마침 시험평가를 주관한 육군교육사령부 시험평가단의 이상학(작고·육사26기·준장 예편) 단장은 "시험평가 중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시험을 계속할 수 있는 방안을 수립하라"고 시험평가 주무 장교에게 지시했다.


연구진은 이에 종합군수지원요소(ILS) 시험을 받고 있던 실용시제 2호를 사격 및 야전 운용시험평가용으로 전환했다. ILS 시험은 시험순서를 조정, 시제 1호가 복구되는 시기로 3개월 늦췄다. 


연구개발진은 다시 각오를 다졌다. 어렵겠지만 해야 한다. 언제는 조건이 좋은 상태였는가. 연구개발진은 무서운 저력을 발휘했다. 휴식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3개월 이 채 안돼 시제 1호가 복구돼 시험평가에 투입됐다. 단위장약도 개선해 사격시험용으로 적용됐다. 


1998년 3월 시제 신자포 시험평가는 정상궤도에 올라 시험이 진행됐다. 안흥 종합시험장에서 사격시험, 야전에서 야전운용적합시험, 국과연 창원 기동시험장에서 기동시험과 내구도시험이 진행됐다. 


1998년 5월 사업책임자 김종규 박사는 또 한번 고심해야 했다. 이번에는 지속발사속도시험을 앞두고 누구를 포반장으로 선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다. 그렇다고 강신천 선임연구원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는 화재사고로 손등과 몸 여러 곳에 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았으며 퇴원 후에도 손등에 상처가 남아 있었다. 또 심리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김 박사가 그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그는 뜻밖의 방문을 받았다. 강선임연구원이 찾아온 것이다. "지속발사속도 등 몇 가지 남아 있는 시험에 그전처럼 자주포에 탑승해 시험을 주도하겠다며 허락해달라는 것이었지요.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김종규 박사) 


강신천 선임연구원이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사격시험을 계속하겠노라고 자청한 데 이어 안흥 종합시험장의 조기호 기술원도 화상이 완치되자 화력시험에 다시 참여했다. 이들의 참여 속에 지속발사속도·최대사거리·분산도 등 시험이 계획대로 진행됐다. 


연구진은 운용시험으로 작전운용능력의 적합성, 운용조작 편의성 및 안전성, 기존 무기체계와의 상호 운용 적합성, 야전운용·전술적 운용능력·전력화지원요소 등을 포함한 전반적인 시험평가를 실시했다. 그 기간 중 사격시험은 4100여 발이 발사됐고 1만3800㎞의 주행시험을 가졌다. 


실용운용시험을 수행한 군단 포병여단장 김태영(국방부장관 역임) 장군은 시험을 마치면서 연구개발진에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사거리 40㎞급의 신자포는 우리 포병의 긍지를 살리는 역사적인 일이며 꼭 전력화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란다"며 신자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시험부대장의 이 말 한마디는 연구개발진이 시험을 수행하면서 겪은 온갖 어려움을 잊고 연구개발 후속조치를 하는 데 충분한 힘이 됐다. 


이윽고 98년 10월2일 육군은 신형 155㎜ 자주포 XK9의 운용시험평가를 합동참모본부에 보고하면서 ‘전투장비 사용가(可)’를 건의했다. 10일 후 합참은 무기체계심의회에서 기상여건으로 실시하지 못한 동계 강설기동시험을 실시한 후 결과를 보고할 것을 조건으로 ‘전투장비 사용가’를 의결했다. 연구개발진은 전투장비사용가 판정에 붙은 단서 조항을 해결해야만 했다. 


1998년의 겨울은 유난히 눈이 오지 않은 해였다. 적설량이 충분해야만 실시할 수 있는 동계 강설기동시험을 야전에서 수행할 수는 없었다. 이듬해 2월까지 기다려도 눈이 충분히 오지 않았다. 하늘의 무심함을 탓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연구진은 스키장을 빌려 시험하기로 계획하고 전국의 스키장을 조사했다. 그러나 스키장은 50톤에 가까운 중량을 수용하기 곤란하다며 거절했다. 연구진은 홍천에 있는 ‘대명비발디’ 스키장을 방문, 국가적 안보에 기여한다는 차원에서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대명비발디 측은 3월2일부터 5일간 오후 11시부터 이튿날 오전 5시까지 스키장의 야간 조명등을 켜고 시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스키장 관리인들은 연구진과 시험평가 장교의 요청에 따라 눈을 정리하는 등 연구진과 함께 동참해주었다. 시험은 모든 시험항목을 만족시켰다. 이로써 연구진은 연구개발과 시험평가에 필요한 모든 시험을 완료했다. 


5일간의 시험을 마친 뒤 연구진은 조명등을 사용한 전기세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사례했지만 대명비발디 측은 "국가안보를 위해 썼다고 생각하겠다"며 극구 사양했다. 비발디 스키장에는 그 후 국과연 소장이 국방연구개발사업의 헌신적 지원에 답하는 뜻으로 감사장을 전달했다.




신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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