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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릴 물감으로 캘리포니아 햇빛을 담다

입력 2022. 05. 24   16:43
업데이트 2022. 05. 2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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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날씨가 주는 행복을 솔직하게 표현한 데이비드 호크니

밝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런던서 LA 이주
수영장 그림으로 대중·비평가 관심 받아
직선·사선·원근법 사용 도시적 작품 완성
팝아트 대표하며 혁신적 작품세계 구축



우리 감정은 가족이나 친구, 동료에 의해 많이 좌우되지만, 날씨에 의해서도 꽤 영향을 받는다. 쾌청한 날씨에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고 온종일 비가 내리는 장마철이나 햇살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잿빛 하늘만 보이는 날씨에는 자신도 모르게 우울해지는 것이 사실. 날씨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작품 세계를 펼쳐 보였던 화가가 데이비드 호크니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1937~)는 1963년 미국 LA를 처음 방문하자마자 캘리포니아의 날씨에 매료되었다. 전반적으로 흐리고 차가운 런던 날씨에 비해 밝고 뜨거운 기후를 가진 그곳의 여유로우면서도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끌린 호크니는 LA 이주를 결심한다. 영국에서는 추운 날씨 탓에 수영장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캘리포니아에서는 개인수영장이 흔하다는 점이 그를 흥분시켰다. 결국 호크니는 1964년부터 수영장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면서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게 된다.



‘더 큰 첨벙’, 1967년,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더 큰 첨벙’, 1967년,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호크니가 수영장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 ‘더 큰 첨벙’이다.

화면 전면을 수영장이 차지하고 오른쪽 아래 노란색의 다이빙 보드가 수영장을 향해 뻗어 있다. 수영장 안에는 커다란 물보라가 소용돌이치고 있다.그 뒤로 의자 하나가 있고, 두 그루의 야자수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배경이 된 단층집 대형 창문에는 건물과 야자수가 보이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다. 수영장 안의 흰색 물보라는 사람이 다이빙 보드를 떠나 물속으로 방금 뛰어들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배경이 된 야자수와 통유리창이 있는 단층집은 캘리포니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 양식으로 평범한 가정집이고 야자수, 통유리창,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캘리포니아의 지역적 특징을 나타내는 요소다. 단정하고 평평한 느낌의 배경과 달리 다이빙대에서 뛰어들며 생긴 거대한 물보라는 화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데 상단의 직선 건물과 하단의 노란색 다이빙 보드가 균형을 이루며 원근감을 연출한다.

호크니는 직선과 사선, 그리고 원근법을 사용해 현대적이고 도시적이면서 만화 같은 느낌의 작품을 완성했다. 선명한 색상은 그래픽 이미지 같은 느낌을 자아내지만 가느다란 선과 점, 굵은 붓질로 표현된 거대한 물보라는 단순한 공간의 도안으로 인식될 수 있는 작품에 ‘회화’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호크니는 단순한 건물과 쏟아지는 햇살을 선명한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광택이 풍부하고 얇게 발리는 아크릴 물감이 캘리포니아 햇빛을 담기에 적합한 재료라고 판단해 이 시기부터 즐겨 사용해왔다.



‘멀홀랜드의 드라이브-아틀리에로 가는 길’, 1980년, 캔버스에 아크릴, LA 카운티 미술관 소장.
‘멀홀랜드의 드라이브-아틀리에로 가는 길’, 1980년, 캔버스에 아크릴, LA 카운티 미술관 소장.

 

감성보다는 이성과 질서정연함을 추구한 호크니는 사람의 움직임과 쏟아지는 햇살을 통해 자신의 화풍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음산한 영국 날씨에 익숙해 있던 호크니는 황금빛 태양, 해변, 그것을 즐기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꼈는데 근심 없는 남부 캘리포니아 생활을 그린 작품이 ‘멀홀랜드의 드라이브-아틀리에로 가는 길’이다.

송전탑 사잇길로 들어서면 우거진 나무와 꽃이 만발한 들판이 굽이굽이 펼쳐져 있다.

화면 왼쪽 아래 수영장과 붉은색 지붕의 집, 그리고 테니스 코트가 보이고 그 옆에는 유칼립투스 숲이 보인다.

송전탑 옆길을 따라 붉은색 지붕과 노란색 벽을 가진 집이 보이는데 호크니의 스튜디오 시티다.

호크니의 이 작품은 캘리포니아의 전형적인 풍경을 담아내면서 강렬하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해 사물의 형태를 강조하고 있다.

매일 아침 집에서 산타모니카의 아틀리에로 자동차를 운전해 이동하면서 보았던 풍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호크니는 중국 두루마리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작품을 제작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생활하며 만난 사람들과 장소에 감성적으로 반응했던 그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집을 배경 삼아 친구나 커플, 가족 초상화도 반복적으로 그렸다.



‘클라크 부부와 고양이 퍼시의 초상’, 1970~1971년,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클라크 부부와 고양이 퍼시의 초상’, 1970~1971년, 캔버스에 아크릴,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클라크 부부와 고양이 퍼시의 초상’이다.

미니멀 스타일로 꾸며진 1970년대 아파트 실내를 배경으로, 패션디자이너인 오시 클라크가 고양이 퍼시를 무릎에 앉힌 채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본다.

발코니 옆에는 클라크의 아내이자 텍스타일 디자이너인 셀리아 버트웰이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 한 손을 허리에 올리고 서 있다.

왼쪽 벽에는 호크니의 초기작 ‘난봉꾼의 행각’ 에칭 시리즈가 걸려 있다. 그림은 화가와 클라크 부부의 친분을 나타낸다. 호크니는 맨체스터 예술학교에서 공부하던 시기 클라크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화면 중앙에 반쯤 열린 발코니 문을 통해 보이는 커다란 나무줄기는 부부가 사는 곳이 고층 아파트라는 것을 보여준다. 화면 왼쪽 아래 흰색 탁자 위 노란색 표지의 책과 꽃병, 그리고 바닥의 전화기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부부의 취향을 드러낸다. 신발을 벗고 한쪽 팔을 팔걸이에 걸친 채 편안하게 앉은 클라크의 자세는 이곳이 집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전통적인 부부 초상화와 달리 작품 속 부부는 서로 떨어져 있는 데다 마주 보지도 않고 앞을 응시하고 있다. 이는 현대 가정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자의 자세 역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데 이는 사회적 일원으로 당당하게 일하는 여자들을 대변한다.

호크니는 18세기 토머스 게인즈버러가 그린 ‘앤드류 부부의 초상화’를 연구해 전통적인 2인 초상화 속 부부의 관계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정지된 듯 고요한 장면을 통해 관람자들에게 그림 속 등장 인물의 삶에 호기심을 갖게 하고 이들을 보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게끔 유도한다.

LA 수영장을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 팝 아트의 대표 화가로 명성을 얻은 호크니는 이후 팝아트뿐만 아니라 판화가, 사진가, 삽화가, 무대연출가로 활동했다.

정물, 초상, 풍경 등 전통적인 대상들을 주제로 삼지만, 대상을 재현하지는 않았던 그는 사진과 디지털 기술 등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방식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미지=필자 제공



필자 박희숙 작가는 동덕여대 미술대학,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수 매체에 칼럼을 연재했다. 『명화 속의 삶과 욕망』, 『클림트』,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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