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신지영 조명탄] H에게 보내는 열 번째 편지: ‘뭐든지’의 무게

입력 2022. 05. 19   15:29
업데이트 2022. 05. 1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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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신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랑하는 조카 H에게.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기분 좋은 봄날이다. 미세먼지와 황사가 없는 봄을 맞이한 게 얼마 만인지. 날씨도 화창하고 초록빛도 고우니 걷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얼마 전에 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단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그 친구가 선물에 대한 고모의 글을 읽었다며 글을 읽으면서 선물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가 생각났다고 했어. 그 친구와 그 친구의 조카 사이에 있었던 선물과 관련한 이야기라고 했지.

그 친구는 조카의 생일이라 조카에게 선물을 사 주고 싶었대. 그런데 조카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고민이 되더래. 뭘 사줄까 고민하다가 선물은 받는 사람이 원하는 걸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조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대. 백화점에 도착한 친구는 조카를 데리고 장난감코너로 가서 갖고 싶은 걸 사 줄 테니 뭐든지 골라보라고 했대.

조카는 신이 나서 장난감코너의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한참을 골랐대. 그리고는 드디어 갖고 싶은 것을 찾았다며 친구를 데리고 자신이 고른 장난감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거야. 그런데 조카가 고른 장난감을 보고 그 친구는 몹시 당황스러웠대. 조카가 고른 장난감이 너무 과한 거였던 거지. 뭐든지 사 줄 테니 고르라고는 했지만, 조카가 그렇게 과한 것을 선물로 고를 줄은 몰랐다고 했어.

조카는, 뭐든지 사 줄 테니 골라 보라는 자신의 말을 믿었을 뿐이니 잘못한 게 없는데도 조카가 고른 장난감을 보고 ‘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좀 기분이 이상해지더래. 자신이 한 말도 있고 조카가 열심히 고르고 골라서 사달라고 한 거라 다른 걸 고르라고 할 수가 없었대. 울며 겨자 먹기로 사 주기는 했지만, 선물을 사 주면서도 마음이 기쁘지 않더래. 오히려 조카에게 조금은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는 거야. 그 친구는 고모에게 자신이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어. 우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선물하면서 왜 우리는 상대에게 뭘 갖고 싶은지를 묻는가였어. 선물을 준비하면서 상대에게 뭘 갖고 싶은지 묻는 건 참 흔한 일인 것 같아. 그리고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아. 선물을 한다면 상대가 원하는 걸 해 주고 싶을 테고 뭘 원하는지는 선물을 받는 사람이 가장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워서겠지.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이게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상대에게 뭘 갖고 싶냐고 묻는 일이, 어쩌면 상대를 생각하는 척하면서 나의 고민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내가 상대에게 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질문을 하는 순간, 선물을 골라야 하는 고민이 나에게서 상대방에게로 이동하게 되니까 말이야.

그러니 ‘선물로 받고 싶은 게 뭐야?’ ‘선물로 줄 테니 뭐든지 골라 봐’라고 말한 건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나를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상대가 내 경제 상황을 고려해서 너무 과하지 않은 범위에서 자신이 갖고 싶은 걸 말해야 내가 적절하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뭐든지 골라 봐’라는 말은, 정말 뭘 말해도 기꺼이 사 줄 수 있는 상황에서만 해야 하는 말이었던 거야. 내가 ‘뭐든지’라고 말해 놓고는, 상대가 내 생각 이상의 ‘뭐든지’를 골라서 서운해진다면 그건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인 거야. 이렇게 고모는 그 친구 덕분에 우리가 쉽게 쓰는 ‘뭐든지’라는 말의 무게를 깨달았어. ‘뭐든지’라는 말, 정말 신중히 써야 하는 무거운 말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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