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현대미술 이야기

예술품이 된 소변기 미술혁명 가져오다

입력 2022. 05. 10   17:28
업데이트 2022. 05. 1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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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움직임을 예술로 끌어낸 마르셀 뒤샹


움직이는 여인의 팔·다리 
입체주의·미래주의로 표현
 
규칙 얽매인 미술계에 회의...
기성품 사용 작품 선보여
신개념 ‘레디메이드’ 창안...다다이즘·팝 아트 등에 영향
 
‘샘’(1917년 작품은 사진으로 남아 있어 후에 다시 제작했다), 1917·1964년, 남성용 소변기, 스톡홀름 근대 미술관 소장.
‘샘’(1917년 작품은 사진으로 남아 있어 후에 다시 제작했다), 1917·1964년, 남성용 소변기, 스톡홀름 근대 미술관 소장.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 1912년, 캔버스에 유채,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 1912년, 캔버스에 유채,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기차를 탄 슬픈 청년’, 1911년, 캔버스에 유채, 마분지에 부착,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소장.
‘기차를 탄 슬픈 청년’, 1911년, 캔버스에 유채, 마분지에 부착,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소장.

현대 사회는 온갖 기계들이 이끌어 간다. 가정에서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사업체에도 자동화 기계가 가득하다.

눈만 돌리면 쉽게 기계를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습관처럼 사용할 뿐 그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기술자나 과학자들만 기계에 관심을 두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운데 뜻밖에 예술가 중에도 기계에 열광한 사람이 있다.

누구보다도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기계의 움직임에 주목했던 화가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이다.

기계에 관한 뒤샹의 관심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이다. 화면 중앙 무릎을 구부린 여인이 움직이고 있다. 화면 하단에 여러 개의 계단이 보인다.

여인이 연속적으로 무릎을 구부린다는 것은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에 따라 여인의 팔이 움직인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의 팔과 다리는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 같아 인체처럼 보이지 않는다.

뒤샹은 모델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기하학적으로 재해석해 평면에 그린 입체주의로 표현했지만 움직이는 사람의 표현은 미래주의 양식을 따랐다.

뒤샹이 이 작품을 그리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은 1911년 영국 출신의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인간의 움직임을 찍은 동체 사진’이었다. 사람의 움직임을 단계적으로 가시화한 이 사진은 시간 차를 두고 찍은 한 가지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모아 놓은 사진이다.

이처럼 현실의 움직임을 분석한 사진의 영향을 받은 미래주의자들은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래주의는 190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미술사조로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그 놀라운 성과에 자극을 받은 화가들이 현대 기계문명을 표현하기 위해 창시한 것이다.

미래주의가 기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과학기술 숭배를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래주의 화가들은 속도를 숭배하면서 그 속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속도가 진부한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예술가들이 속도에 집착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자동차, 증기 기관차 등으로 삶의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뒤샹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작품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를 제작할 당시 종교적·철학적·윤리적 아이디어를 전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그림보다 인체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진학적 해부에 관심을 가지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 ‘잽싼 나체들에 둘러싸인 왕과 왕비’ 등 4점을 제작한다.

이처럼 기계에 관심이 많았던 뒤샹은 직접 기계를 제작할 정도로 ‘기계광’이었다. 기계의 효율성과 엔진의 규칙적인 리듬에 매료된 그는 기계가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뒤샹은 1913년 이 작품을 미국 뉴욕의 69연대 병기 창고에서 열린 ‘아모리 쇼’에 출품한다. ‘아모리 쇼’는 미국 회화조각가협회의 멤버 25명이 조직한 것으로 유럽의 전위 미술을 소개하기 위한 전시회였다. 당시 미국은 혁신적인 미술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가 전시되자마자 보수적인 미국 미술계는 엄청난 비난을 퍼붓는다. 아름다움의 상징인 여성을 기계로 표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입체주의 화가들에게도 비난받는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표현하는 방식이 미래주의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입체주의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기를 원했던 입체주의 화가들은 결국 뒤샹에게 작품을 철수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 제작 이전에 그의 생각에 나타난 중대한 변화를 반영한 작품이 1911년 제작한 ‘기차를 탄 슬픈 청년’이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검은색 옷을 입은 인물이 움직이고 있다. 단순한 배경은 기차를, 인물이 길게 서 있는 모습은 복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물이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움직임, 즉 복도를 서성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그의 자화상이다. 뒤샹은 여동생 쉬잔을 무척 아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정기적으로 그녀가 사는 루앙을 방문했고 주로 기차를 이용했다.

뒤샹은 기차 안에서 여동생을 만나기 전 자신의 모습을 왜곡된 형태로 표현했다. 뒤샹은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입체주의에 매료되어 큰 영향을 받았지만, 입체주의가 지향하는 예술에 대해 전반적으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 2’ 사건을 통해 이런저런 규칙들에 얽매인 미술계에 회의를 느낀 뒤샹은 기성품을 사용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뒤샹이 기성품을 활용해 ‘레디메이드’란 새로운 개념을 창안한 작품이 그 유명한 ‘샘’이다.

‘R.Mutt 1917’이라고 서명한 남성용 변기를 활용한 이 작품은 1917년 미국 독립 예술가 협회에서 주최한 ‘앙데팡당전’에 처음 출품되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미국 미술협회는 전시를 거절했지만, 뒤샹은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 1845년』이라는 책을 읽고 감명받아 예술가가 의지만 있다면 진부하거나 대량 생산된 물건들도 얼마든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에 기초해 그는 작품을 디자인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이 발견한 오브제를 ‘미술 작품’이라고 칭했을 뿐이었고 결국 이 작품은 미술의 혁명을 가져왔다.

뒤샹은 변기에 미술 작품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세 가지 변화를 주었다. 첫 번째가 받침대, 두 번째가 서명과 연도, 그리고 마지막이 현대 미술 전시회 출품이었다. 받침대로 인해 소변기는 마치 조각상처럼 보였고 ‘R.Mutt 1917’이라는 서명은 이 오브제가 미술작품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뒤샹은 이 작품에 일부러 가명으로 서명했는데 그에게 서명은 예술적 제스처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뒤샹은 이 오브제를 기존의 미술 전시회를 통해 선보이면서 이것이 명백하게 미술 작품임을 알린다. 또한 그는 작품을 통해 산업화로 대량생산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뒤샹의 의도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레디메이드에 대한 논란이 일어난다.

뒤샹의 기계에 대한 사랑은 정밀한 광학적 오브제들과 영화 실험 작업을 통해 이어져갔다. 그는 1920년대 체스 게임에 빠져 작품 활동을 잠시 중단하기도 했지만, 뒤샹이 미술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 입체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팝 아트와 개념 미술은 물론 미니멀리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미지=필자 제공


필자 박희숙 작가는 동덕여대 미술대학,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수 매체에 칼럼을 연재했다. 『명화 속의 삶과 욕망』, 『클림트』,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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