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백과 R&D이야기 K9 자주포

[K9 13회] 신자포 체계개발과 차량개발의 분리 의견 나오자....

신인호

입력 2022. 04. 1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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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삼성테크윈 창원공장에서 출고된 K55자주포. 사진=삼성테크윈
1990년대 삼성테크윈 창원공장에서 출고된 K55자주포. 사진=삼성테크윈

‘국가를 방위하는 기본 병기를 제 손으로 만들지 못하는 국가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1990년대 초 삼성테크윈(당시 삼성항공, 현 한화디펜스) 창원공장에는 이같은 내용의 슬로건이 공장 내에서 가장 높고 규모가 큰 초대형 크레인에 쓰여 있었다. 당시 삼성테크윈의 방산사업 총괄을 맡고 있던 노석호 특수사업본부장은 직원들과 함께 그 슬로건을 보면서 삼성이 K55(KM109A2) 자주포를 생산, 국가 방위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져왔다.


1991년 겨울, 신형 자주포의 체계개념 연구가 마무리될 즈음 국방과학연구소 화포체계팀은 자주포체계 전문방산업체로 지정 받은 삼성테크윈의 한삼수 전 특수연구소장 등 기술진과 신자포 개발 관련 업무협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체계팀은 신자포의 차량 분야는 개발 경험과 기술력이 있는 업체가 담당하고 삼성테크윈은 체계조립을 맡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삼성테크윈이 비록 미국과 자주포를 공동생산하면서 자주포를 국내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직접적인 개발 경험이 없어 국내의 다른 궤도차량 전문업체에 비해 개발기술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서 제안된 것이다. 


체계팀은 그래서 탐색개발계획에는 기동실험차량(MTR : Mobility Test Rig)을 개발, 제작하는 계획이 없다는 내용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삼성테크윈 기술진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심장이 멈추고 눈앞이 아득해졌을"(한삼수 소장) 정도였다. 


당시 삼성테크윈은 K55 자주포용 탄약운반차 사업을 두고 다른 기동장비업체와 첨예하게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크게 와 닿았다. 한 소장에게는 이것이 삼성테크윈의 방산부문에 대한 기술평가의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 소장은 곧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삼성은 중장비·조선사업도 하고 있어 차량 관련 시스템 기술과 용접 기술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고, 삼성중공업 기계전자연구소·삼성종합기술원의 지원을 받으면 궤도차량 또한 개발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K55의 공동생산 경험밖에 없는 기술 수준이었기 때문에 국과연 체계팀의 판단이 옳다 여기면서도 자주포 체계 전문업체로서 차량 분야를 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차량을 기본으로 포병과 관련된 탄약운반차량·사격지휘차량 등의 계열 장비를 개발, 계속 생산해야 하니까요."(한 소장)


삼성테크윈이 K55 차대를 기반으로 개발, 제작된 탄약운반장갑차 시제. 삼성테크윈 자체적으로 K66이라고 부르며 D사와 경쟁했으나 개발사업이 취소되면서 개발이 완료되지는 못했다. 사진=삼성테크윈
삼성테크윈이 K55 차대를 기반으로 개발, 제작된 탄약운반장갑차 시제. 삼성테크윈 자체적으로 K66이라고 부르며 D사와 경쟁했으나 개발사업이 취소되면서 개발이 완료되지는 못했다. 사진=삼성테크윈


노석호 본부장은 한 소장 등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곧 MTR 개발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기술진은 내심 개발 비용이 많이 소요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 본부장은 특수연구소의 연구 인력을 대폭 증원할 것과 MTR 개발에 투자할 것을 주저없이 결심하고 있었다. 삼성테크윈의 미래를 위해.


1992년 새해가 밝아오면서 신자주포의 탐색개발사업이 국방부로부터 승인돼 분야별 연구개발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년 기간으로 계획된 탐색개발은 참으로 짧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작전운용성능(ROC)을 충족할 수 있도록 개발이 가능한지 탐색하면서 체계개발동의서(LOA)를 작성하고 체계개발계획도 수립하는 기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친 시기이기도 했다. 구소련의 붕괴로 인해 신국제질서가 구축되는 가운데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한반도 비핵화 선언, 그리고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남북 합의서가 타결되었다.


국과연도 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걸프전이 무기체계분야에 던진 교훈도 깊게 고려해야 했다. 국과연은 변화를 모색했다.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 즉 질 위주의 자동화한 고도의 전략 정밀 무기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재래식 병기 또는 체계 위주 개발보다 핵심기술 연구가 강조되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92년 2월 들어 국과연은 기술연구본부를 발족시켰지만 신자주포와 같은 화포개발사업은 위기를 겪어야 했다. 신자주포가 첨단 자동화 화기임에도 재래식 병기로 분류, 국과연 본연의 연구개발사업이 아니고 업체가 해야 할 사업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연구소 내부에서도 대두되었다. 더욱이 국방부에서도 이런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 국방일보 원문 기사

국방일보 국산 무기체계 개발 비화

『철모에서 미사일까지』 제3화 「K9 155mm 자주포」

<13> 미래전 대비 핵심기술 연구 2002년 10월 30일자

신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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