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정민재 조명탄] ‘덕업일치’의 삶

입력 2022. 02. 11   16:48
업데이트 2022. 02. 13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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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


목요일마다 KBS 라디오 ‘황정민의 뮤직쇼’에 출연하고 있다. 얼마 전 방송 주제는 20년 전, 그러니까 2002년의 히트곡이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바로 그때다. 보아를 넘버원 자리에 올린 ‘No.1’, 국민 여동생 장나라의 ‘Sweet Dream’, 전국의 노래방을 강타했던 체리필터의 ‘낭만 고양이’와 부활의 ‘Never Ending Story’ 등 지금 들어도 주옥같은 곡들이 그해에 나왔다. 추억의 노래들을 쭉 다시 듣다 보니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 듣는 것 외에는 딱히 취미가 없었다. 컴퓨터 게임에도 흥미가 없었고, 축구와 농구 같은 운동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에 돌아와 음악을 들었다. 용돈이 생긴 날에는 레코드 가게에 들러 한참 동안 CD를 구경하다 어렵게 한 장을 골라 구매하고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새로 산 앨범을 오디오에 걸고 책상 앞에 앉아 속지를 들여다볼 때면 그렇게 설렐 수 없었다. 이미 MP3 플레이어가 있던 시절이지만, 나는 CD로 듣는 게 더 좋았다.

낭만적인 추억처럼 보이지만,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생의 용돈에 CD는 결코 저렴한 물건이 아니었다. 사고 싶은 앨범 한 장을 사기 위해선 몇 주 동안이나 용돈을 모아야 했다. 그렇다고 감히 문제집이나 학용품 살 돈으로 CD를 살 수는 없었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할 것 아닌가. 다행히(?) 당시 살던 집에서 학교가 제법 떨어져 있어 부모님께 용돈 외에 교통비를 따로 받았는데, 가끔 이 돈을 유용해 앨범을 사고 버스를 타는 대신 30여 분을 걸어 다니곤 했다.

부모님께선 아들의 CD 수집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두 분 역시 음악을 좋아했지만, 학업에 쏟아야 할 에너지가 음악에 분산되자 염려한 것이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CD를 보며 ‘용돈을 끊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난 비교적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지만, 음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방 한구석에 숨겨 CD를 사 왔고, 집에 오자마자 책상 서랍 귀퉁이에 새로 산 앨범을 숨겼다. 부모님은 그 시절 나의 소심한 비행을 알고도 눈감아 주신 걸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만큼 음악이 좋았다. 음악을 듣는 시간이 행복했고, 음악에 대한 글을 읽고 라디오에서 전문가의 해설을 듣는 것만큼 재밌는 일이 없었다. 해외 팝 앨범의 국내 발매반을 사면 들어있던 라이너 노트, 해설지가 어린 내겐 교과서 같았다. 그때도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볼 순 있었지만, 검증된 전문가가 그만의 언어로 직접 쓴 글이 더욱 마음 깊이 저장됐다. 새로운 노래와 음악 정보를 들려주는 라디오는 꼭 개인 과외처럼 느껴졌다.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전부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던 나는 결국 음악에 자리를 잡았다. 돌이켜 보면 지금처럼 음악에 대한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게 학창 시절 꿈이었다. 실제로 이뤄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내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나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에 가까웠다. 시간이 흘러 처음으로 내 이름이 적힌 라이너 노트를 마주하던 날, 라디오 생방송을 무사히 마치던 날을 기억한다. 그때의 감격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겪어보니 ‘덕업일치’의 삶에도 어려움은 있다. 그럼에도 고충보다 행복이 큰 것만은 분명하다.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면 싫어지기도 한다는데, 여전히 음악 듣는 일이 그 무엇보다 즐거워서 다행이다. 내가 만나본 음악가 중 대다수는 어린 시절부터 좋아한 음악을 꾸준히 좇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고 했다. 나 역시 좋아하던 걸 계속 좋아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무언가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 여기서 비롯되는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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