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명

오늘의 전체기사

2022.05.23 (월)

HOME > 기획 > 교양 > 여행

눈이 내려 길이 되고 산에 올라 길을 찾네

기사입력 2022. 01. 20   16:49 최종수정 2022. 01. 20   16:51

겨울 눈꽃 산행


눈과 상고대로 뒤덮인 소백산 정상부. 겨울왕국을 떠올리게 한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 국내 최대 전나무 군락지다. 월정사 일주문 앞에 1㎞가량 이어진다.
한라산 정상 등정을 하려면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도 운이 좋아야 백록담을 볼 수 있다.

한 번은 눈 덮인 산을 걸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겨울의 기별이 가실 때쯤 ‘벌써 봄이라니’ 하며 아쉬워한다. 눈과 산. 어떤 직업군에게는 최악의 단어 조합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속이 메슥거리는 기분을 이해한다. 그러나 알아두시라.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등산의 지위가 달라졌다. 이제 등산은 산악회의 전유물도, 장년층만의 주말 스포츠도 아니다. 해외여행이 막히고 실내 활동이 꺼려지는 감염병의 시대, 등산은 운동과 놀이 그리고 여행을 아우르는 활동으로 떠올랐다. 동네 뒷산이나 한라산이나, 코로나 전에는 안 보이던 20~30대 등산객이 수두룩하다. 전투복 대신 등산복을 입고 친구와 함께(물론 6인 이하로) 산을 오르면 그토록 지겹던 산이 달리 보일 수 있다.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장쾌한 풍경을 볼 수 있는 ‘눈꽃 산행’ 명소를 세 곳 소개한다.


사색하며 걷기: 오대산 선재길

가장 쉬운 코스부터 소개한다. 오대산 선재길. 아득한 꼭대기(1563m)를 오르는 게 아니라 산기슭에 자리한 월정사부터 중턱의 상원사까지 가는 길이다. 편도 거리가 약 10㎞이지만 표고 차가 250m로 완만하다. 길도 순하고 펼쳐지는 풍광도 느슨하다. 구도자들이 수행하며 걷던 길답다. 혼자 사색하며 걸어도 좋고 동행과 소곤소곤 담소 나누며 걸어도 좋다. 요란함과는 거리가 먼 길이다.

월정사에 들어서기 전, 울울한 전나무 숲이 반겨준다. 무려 1700그루에 달하는 국내 최대 전나무 군락지다. 전나무 숲길은 사계절 근사하지만, 눈이 융단처럼 깔리고 잎사귀에 흰 눈이 얹힌 겨울이 가장 아름답다. 드라마 ‘도깨비’에도 여기서 촬영한 겨울 장면이 나온다.

월정사 경내를 둘러본 뒤 오대천을 따라 걷다 보면 흥미로운 역사의 흔적도 마주친다. ‘회사거리’라는 곳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목재공장이 있던 자리다. 훈련용 나무총과 연필 등을 만들어 서울로, 주문진으로 보냈다. 월정사에서 3㎞쯤 걸어 오르면 ‘섶다리’가 나타난다. 굵은 소나무로 기둥과 상판을 만들고 잔가지를 얹은 옛날식 다리다. 인증사진 명소다. ‘화전민 터’도 있다. 화전민 360가구가 이 깊은 산골에 살았는데,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 모두 산 아래로 이주했다.

느긋하게 걷다 보면 어느새 상원사다. 월정사에 비하면 아담하지만, 명성만큼은 뒤지지 않는 절이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신라 성덕왕 때 만든 동종(국보 제36호)이 있다. 한때 한강의 발원지로 불렸던 ‘우통수’도 절에서 멀지 않다. 참고로, 월정사는 연중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니 산사에 머물며 번뇌를 떨치는 것도 좋겠다.


파도치는 새하얀 능선: 소백산

소백산은 이름에 소(小) 자가 들어가지만 만만히 봐선 안 된다.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에 걸쳐 있는 크고 높은(1439m) 산이다. 소백산이 가장 북적일 때는 철쭉꽃이 만발하는 5월이지만 1~2월 눈꽃 산행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소백산 능선은 북동에서 남서 방면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겨울 북서풍이 그대로 산으로 들이쳐 상고대(나무나 풀에 내려 눈처럼 된 서리)가 잘 생긴다.

7개 등산로 중 ‘천동계곡 코스’를 최근에 다녀왔다. 난이도 ‘하’로 분류한 왕복 13.6㎞ 코스인데, 겨울 산행 난이도는 중상급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 길이 미끄럽고 정상부 바람이 거세서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 활동이 불편한 롱패딩, 땀 배출이 안 되는 청바지는 적합하지 않다. 기능성 옷을 여러 겹 챙겨 땀이 날 땐 벗었다가 쉴 땐 입는 방식이 좋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등산화에 덧신는 ‘아이젠’도 필수다.

다리안관광지를 출발해 완만한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해발 1000m 천동 쉼터에 닿는다. 천동삼거리를 지나면 시야가 트인다. 키 큰 나무는 사라지고 허리 높이의 철쭉 군락이 나타난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는 ‘주목’도 보인다. 곧이어 장쾌한 정상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 ‘비로봉’이 눈앞에 보이지만 저벅저벅 진군하기가 쉽지 않다. 회초리 같은 칼바람이 몰아친다. 스키용 고글을 끼는 사람도 있는데 결코 ‘오버 액션’이 아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후려친다. 그러나 새하얀 설원과 겹겹 능선이 파도치는 장관을 보면 고생이 잊힌다. 가슴이 뻥 뚫린다. 차를 가져왔다면 왔던 길을 되밟아 하산하면 된다. 조금 다른 길을 가보고 싶다면 연화봉을 거쳐 희방사나 죽령 쪽으로 내려가는 것도 좋다.


예약해야 볼 수 있는 백록담: 한라산

누가 뭐래도 한라산이다. 비록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하고, 한국에서 가장 따뜻한 이국적인 섬까지 와서 구태여 등산을 해야 하나 싶지만 겨울 한라산을 대체할 산은 한국에 없다.

한국 최고봉(1947m)인 한라산은 설경도 으뜸이다. 문제는 이따금 눈이 너무 많이 내린다는 거다. 이달 12일에도 대설 특보가 내려 입산이 통제됐다.

한라산 탐방로는 5개다. 백록담을 가려면 ‘성판악’ 혹은 ‘관음사’ 탐방로를 이용해야 한다. 2020년 2월부터 백록담 등정은 예약제로 바뀌었다. 성판악은 하루 1000명, 관음사는 500명만 오를 수 있다. 매달 1일부터 다음 달 예약을 접수하는데, 주말은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입장료가 없는데도 인터넷에서 1만~5만 원에 티켓을 거래하기도 한다. 적발되면 1년간 입산 금지다.

길이 험한 관음사보다는 성판악 코스가 인기다. 성판악 탐방로는 오전 6시에 열린다.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탐방객이 도시락을 먹는 진달래대피소를 오후 12시30분에 폐쇄하니 그 전에 통과해야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정상에서는 오후 2시 이전에 하산해야 한다. 성판악 코스는 왕복 19.2㎞. 약 8~9시간 걸린다. 백록담은 운이 좋아야만 볼 수 있다.

반드시 정상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 이를테면 ‘영실’ 탐방로로 올라가서 ‘어리목’이나 ‘돈내코’ 탐방로로 내려와도 좋다. 정상부 윗세오름(1740m)의 풍광이 백록담보다 낫다는 이도 많다. 영실 휴게소부터 윗세오름까지는 약 3.7㎞. 날이 맑으면 탁 트인 설원과 제주 남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돈내코 코스는 백록담을 등 뒤에 두고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고도가 낮아질수록 하얗던 세상에서 원시림으로 풍광이 바뀐다. 금강송과 조릿대, 굴거리나무가 빽빽한 숲도 매력적이다. 이따금 총총 뛰노는 노루도 보인다.


 
필자 최승표는 중앙일보 레저팀 기자다. 국내외 여행 기사를 두루 써왔다. 현재는 역병의 시대를 맞아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소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