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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 공군 창설의 주역 김영환 장군

정호영

입력 2022. 01. 04   14:58
업데이트 2022. 01. 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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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최초 전투기 조종사 ‘빨간 마후라’ 창공을 날다


1948년 육군 소위 임관, 항공부대 간부 활약
6·25전쟁 발발하자 美서 F-51 전투기 인수
전선 누비며 북한군 전력 타격에 결정적 기여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서 해인사 폭격 막아내
팔만대장경·국보급 문화재 지켜 금관 훈장 추서
‘빨간마후라’ 시초이자 영화 실존 인물이기도

 

6·25전쟁 당시 출격 직후의 김영환(왼쪽 둘째) 장군.
6·25전쟁 당시 출격 직후의 김영환(왼쪽 둘째) 장군.
김영환 장군이 조종했던 한국 공군 최초의 전투기인 F-51 무스탕.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에서 맹활약했다.
김영환 장군이 조종했던 한국 공군 최초의 전투기인 F-51 무스탕.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에서 맹활약했다.
해인사 입구 오른쪽에 세워진 김영환 장군 추모비.
해인사 입구 오른쪽에 세워진 김영환 장군 추모비.
한국 공군이 1949년 10월 1일 창설됐을 때 보유했던 유일한 항공기인  L-4 연락기.
한국 공군이 1949년 10월 1일 창설됐을 때 보유했던 유일한 항공기인 L-4 연락기.
1964년 제작된 영화 빨간마후라와 2012년 제작된 영화 R2B 포스터.
1964년 제작된 영화 빨간마후라와 2012년 제작된 영화 R2B 포스터.

공군 최초의 전투 조종사, 빨간 마후라의 신화를 쓰다

공군 창설의 주역 김영환 장군


대한민국 국군은 100년의 전쟁역사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에 의해 지어진 뒤 1948년 정식 정부 수립 후에도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산하로 편입해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였다. 100년이 넘는 전쟁역사의 출발점이다. 이에 국방저널(국방일보)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지난 100년간 나라를 위해 앞장서서 싸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전쟁영웅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1월호의 주인공은 공군 창설의 주역이자 한국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로서 ‘빨간마후라’를 목에 두르며 조국의 하늘을 지켰던 김영환 장군이다.

글=정호영 기자/사진=국방일보 DB


하늘 사나이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는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이 보관돼 있는 불교계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한 곳이다. 이곳 해인사에서는 지난 2002년부터 해마다 6월이면 한 군인을 위해 추모제를 연다. 또 해인사로 올라가는 입구 오른편에 추모비도 세워 공적을 기리고 있다.

해인사에서 추모제와 추모비를 통해 기리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공군 최초의 전투 조종사이자 빨간마후라의 시초인 김영환 장군이다.

불교계에서는 삼보를 경외하여 지키는 천신을 일러 화엄성준, 또는 호법선신이라 부르는데, 팔만대장경을 지킨 김영환 장군의 삶을 천신처럼 여기고 있다. 3보란 불교에서 불(佛), 법(法), 승(僧)을 뜻하는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법보를 의미한다. 대한민국 정부도 지난 2010년에 해인사를 지킨 공로로 김영환 장군에게 금관 훈장을 추서한 바 있다.

김영환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가야산 일대에서 준동하던 북한군 패잔병(약 900여 명)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편대장으로 한국 공군의 전투기들을 지휘하던 그는 해인사에 적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자 고민 끝에 폭격명령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그는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받을 상황에 몰렸지만 “나라보다 귀한 사찰이야 없겠지만 해인사는 공비(토벌)보다는 귀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김영환은 또 한국 공군 창설 간부 7인 중 한 명이자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였다. 김영환은 미 군정 시절인 1948년 4월 항공부대 창설을 위해 기존 항공경력을 인정받지 못한 채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해 육군 소위로 임관한 ‘공군 창설 7인의 간부’ 중 한 사람이었다. 공군 창설 7인은 최용덕·이영무·장덕창·김정렬·박범집·이근석·김영환을 말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투기가 단 1대도 없었던 한국 공군은 미군으로부터 급히 전투기를 인수해야만 했다. 이때 일본으로 가서 미 공군의 F-51 무스탕 전투기를 몰고 온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를 오늘날 공군에서는 ‘10인의 조종사’라고 부른다. 이 중 한 명이 김영환 중령이었고, 이들을 훗날 공군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로 불렀다.

김영환은 대한민국 공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빨간마후라의 주인공이다. 1964년 제작되어 당시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존 인물이 바로 그였다. 김영환은 전쟁 중 출장을 나와 친형(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 집에 가 형수에게 비행 시 착용할 새 머플러를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흰 천이 없어 빨간색 비단 천을 목에 두르고 기지로 귀환하게 된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6·25전쟁 시종을 전선을 누비며 조국의 하늘을 지켰던 공군의 전설적 파이터인 김영환 장군을 대한민국의 전쟁영웅에서 재조명한다.


맨주먹 투혼

김영환은 일제 강점기인 1921년 1월 8일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1931년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간사이대학 법과에 진학했다. 그는 간사이대학 법과 재학 중 징집돼 처음으로 비행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실전에 투입되지는 못하고 일본군 육군 항공소위로 함흥지구에서 복무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김영환은 1948년 5월 육군 소위로 임관해 항공부대 간부가 됐다. 당시 미 군정 하에서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뒤 육군은 물론이고 해군도 독립 군대로서 체계를 갖췄지만 공군은 지지부진했다. 미 군정은 한국에 공군을 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과거 항공경력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항공선각자들은 수모를 견디며 기꺼이 육군보병학교와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중국 공군에서 활동했던 50살 나이의 최용덕을 비롯해 김영환 등 7인을 공군에서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 7인의 간부로 부른다.

이들 7인의 헌신과 노력은 결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10월 1일 공군 창설로 이어졌다. 공군이 창설됐을 때의 전력은 병력 1600여 명과 연락기 20여 대가 전부였다.

김영환에게는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건국기가 도입되었을 때 김신, 장성환과 더불어 한강다리 밑을 지나는 기행을 선보였다. 또 이화여대를 지날 때마다 저공비행을 하며 여학생들을 놀라게 해 민원이 자주 들어왔다고 한다. 그때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인 김영환의 형 김정렬은 동생의 기행을 수습하느라 애간장을 태워야 했다.

김영환은 1949년 공군이 육군에서 분리돼 독립하자 공군비행단의 참모장이 됐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T-6 훈련기를 직접 조종, 출격해 폭탄과 수류탄을 투하하며 전투를 벌였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군에는 미국에서 넘겨받은 L-4, 5 연락기 10대와 T-6 훈련기 10대가 전부였다. 반면 북한은 소련제 전투기 60대 등 220여 대를 앞세워 대거 남침했다. 우리 공군은 훈련기에서 수류탄과 폭탄을 던지며 싸워야 했다. ‘맨주먹 투혼’이었다.

미 극동공군사령부의 고위 관계자는 전쟁 발발 다음 날인 6월 26일 수원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는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에게 한국 공군 중 F-51 무스탕 전투기 조종이 가능한 조종사가 몇 명이나 있냐고 물었다. 이에 김정렬은 10명이 있다고 답변했다.

그날 저녁 이근석 대령을 편대장으로 하는 10인의 조종사는 미군이 보낸 수송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이근석 대령, 김영환 중령, 장성환 중령, 김신 중령, 박희동 대위, 강호륜 대위, 김성룡 중위, 이상수 중위, 장동출 중위, 정영진 중위가 그들이었다.

이들 10인의 조종사는 7월 1일부터 개인당 30분 정도씩 비행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7월 2일 태극마크가 그려진 10대의 F-51 전투기를 조종해 대구 비행장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공군이 처음으로 전투기를 보유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들 10인이 바로 공군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였다.

김영환 중령을 비롯한 10인의 조종사들은 7월 3일부터 곧바로 전선에 투입됐다. 이들은 첫날부터 영등포와 노량진 일대의 북한군을 공격해 전차 2대와 자동차 3대를 파괴하는 등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출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 조종사 중 한 명인 김영환은 최고의 전투 조종사로 명성을 떨쳤다.


해인사 수호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은 한국 공군 1전투비행단(1951년 8월 1일부로 공군비행단에서 개편)이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항공지원을 하던 시기였다.

당시 지리산에는 북한군 패잔병 9500여 명이 경상도와 전라도의 인접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해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치안을 어지럽혔다. 이에 따라 지리산지구 경찰전투사령부의 요청을 받은 한국 공군은 미 공군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공비토벌작전을 벌이게 됐다. 8월 17일부터 시작된 이 작전의 지휘관은 1전투비행단 비행전대장인 김영환 대령이었다.

8월의 끝물인 어느 날, 김영환 대령은 지리산 동쪽 합천 가야산 쪽에서 공비가 출몰했다는 연락을 받고 사천기지에서 출격했다. 편대장이 돼 F-51 전투기를 직접 지휘했다. 그런데 김영환 대령은 공비들이 몰려든 장소를 확인한 순간 고민에 빠져야 했다. 폭탄을 투하해야 할 공격지점이 바로 해안사 경내였던 것이었다.

미군 정찰기가 연막탄을 해인사 경내에 떨어뜨렸다. 이제 네이팜탄 등 폭탄 몇 개만 떨어뜨리면 천년 고찰 해인사는 잿더미가 될 판이었다. “공격을 수행하라”는 상부의 독촉과 “적들이 해인사로 몰려오고 있다”는 부하 조종사의 긴박한 외침이 교차했다. 그러나 편대장 김영환의 최종 결정은 “공격하지 말라”는 단호한 폭격 거부였다. 그렇게 그는 명령 불복종 처벌을 감수하면서 국보인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켰다.

전사에 의하면 지리산 공비토벌작전(51년 8월 17일~9월 18일) 동안 공군 1전투비행단은 공비 558명을 사살하고 은신처 192곳과 건물 39동을 파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작전의 핵심 지휘관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명령 불복종으로 상부에 시달려야 했고, 끝내 진급하지 못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1954년 비행사고로 사망함으로써 사후에 장군(추서 계급)이 됐다.

오늘날 공군 조종사들이 착용한 ‘빨간마후라’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추락한 아군 조종사의 수색 방안을 논의하다가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을 떠올렸다고 한다. 형수가 치마를 만들려고 둔 빨간 천을 보고 착안했다는 설(說)도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빨간색 전투기로 맹활약한 독일 조종사를 흠모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국 공군의 상징이 된 ‘빨간마후라’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와 주제곡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김영환 대령은 긴박한 전쟁 중에도 삶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군인으로 유명했다.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중 그는 대공사격에 피격돼 섬진강 강변에 불시착했다. 이에 같이 비행하던 전투기들이 공비들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사고지역 부근을 엄호 비행하며 구조요청을 했다. 인근 경찰이 급히 출동해 구조작전을 벌여야만 했던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영환 대령은 사고현장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인근 섬진강에서 유유자적 수영을 즐기고 있었고, 무사히 기지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그는 전장 한복판에서도 한줄기 휴머니즘을 잃지 않은 매력적인 하늘의 사나이였다.


창공 속으로

김영환 장군의 최후는 오늘날까지 전설과 같은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다.

휴전 직후인 1954년 3월 5일, 강릉 공군 행사 참석차 비행기를 몰고 가던 김영환 장군은 대관령 부근 어딘가에서 자취도 없이 실종돼 버렸다. 수색대가 그의 흔적을 찾아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시신과 항공기 잔해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태백산맥 골짜기 깊숙이 숨어버렸는지, 아니면 동해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는지. 혹은 그토록 좋아하던 푸른 하늘로 영원히 솟구쳐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김영환 준장(추서 계급)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공군 창설의 주역이자 한국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였던 김영환 장군의 호는 ‘창공(蒼空·푸른 하늘)’이다. 창공은 조국 영공에 ‘번개’처럼 ‘청춘’을 불사르고 간 그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호였다. 그가 F-51 무스탕 전투기를 몰고 처음 출격한 1950년 7월 3일은 ‘조종사의 날’로 지정됐다.

김영환 장군은 실종된 지 19년이 지나서야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1묘역에 안장됐다. 끝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자 뒤늦게 순직 처리한 것이었다. 전쟁기념관은 지난 2019년 10월 1일 김영환 장군을 ‘10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공군 창군(1949년 10월 1일) 70주년의 일이었다.

공군의 창설 주역이자 최초의 전투 조종사로서 조국의 영공을 지키기 위해 불꽃처럼 투혼을 불태웠던 그는 빨간마후라의 전설이자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전쟁영웅이었다.

정호영 기자 < fighter7@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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