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김도헌 조명탄] 일상의 환상

입력 2021. 12. 30   16:08
업데이트 2021. 12. 30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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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도 헌 대중음악평론가
김 도 헌 대중음악평론가


6년 전 이맘때쯤 논산훈련소에서 군가 교육을 받던 느지막한 오후가 떠오른다. 굶주린 동기들이 게 눈 감추듯 먹어버린 쌀케이크와 함께한 생일도, 하루 종일 편지만 쓰던 크리스마스도 그럭저럭 보내고 나니 군대에서의 새해도 이렇게 흘러가겠구나 싶어 조금 헛헛한 기분이었다.

다음 차례 소대를 기다리며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적당히 차가운 공기와 함께 푸른빛으로 화사하게 빛났다. 조금 고개를 내리자 바람에 산들거리는 상록수의 초록빛 물결 아래 환한 햇살이 아름답게 부서졌다.

현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나지막이 노래를 읊조렸다. 인디밴드 꿈에 카메라를 가져올 걸이 부른 ‘일상의 환상’이었다. 군대에 카메라를 가져올걸.

복무 동안 지나치기 쉬운 사소하고 조그만 것들에 집중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전까지 사회에서 나의 관심사는 온통 음악과 공부였다. 하루 종일 음악을 찾아 들으며 집중하고 특징을 찾아낸 다음 가치를 부여하려 애썼다. 글 잘 쓴다, 말 잘한다는 말이 듣고 싶어 도서관에 박혀있거나 좁은 자취방에서 라디오를 듣고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며 서울말의 악센트를 닮고자 했다. 일상은 팽개치기 일쑤였다. 책상 앞에서 지쳐 쓰러져 잠들고 헐레벌떡 일어났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삭막한 일상에서 잠시 격리된 군 시절은 내게 일상을 회복하는 기간이었다. 야간 행군을 하며 밤하늘의 별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초등학생 시절 이후 처음 알았다. 새벽 부대 순찰을 다니면 손바닥보다 작은 청개구리들이 풀숲을 폴짝 뛰어다녔다. 내 또래 친구들은 고루한 팝보다 감미로운 발라드와 힙합을 즐겨 들었다. 모두 사회에선 몰랐던 것들이었다.

최신 정보, 세상 동향 등 놓치는 것도 많았지만, 정서적으로 충만해진 시기였다. 나의 감정, 나의 생각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았던 나는 군 생활 동안 수십 권이 넘는 노트를 빽빽하게 채워나갔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수시로 작은 수첩과 펜을 지니고 다니며 느낌을 기록했다.

제대 후 군 생활에서 얻은 그 습관은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 음악을 듣더라도, 영화를 보더라도, 책을 읽더라도 그 자체로 소비하기보다 콘텐츠 이면의 이야기와 여러 배경을 살피며 최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풀어내는 과정이 너무도 재미있었다. “우리는 오래 쉬었어. 이젠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어.” ‘일상의 환상’을 시작하는 가사대로였다.

그러다 보니 수다쟁이가 됐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글을 쓸 때는 나도 모르게 분량을 넘기고, 대화 중에는 쉴 새 없이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아 꺼내 놓는다.

타인과 대화할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고 어떤 계기로 특정 취향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고민한다. 자제하고 압축하는 법을 사회에서 배우고 있다.

‘조명탄’ 칼럼을 쓰며 여느 때보다 군 시절을 많이 돌아보게 됐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고자 했고 그때의 내가 읽었을 때 기억에 남는 글을 쓰고 싶었다. 소소한 일상의 기록과 음악 이야기가 누군가의 일상에 작은 불빛이라도 밝혀주었다면 크나큰 영광이다. 최고의 코너 이름이다.

긴 시간 지면을 할애해준 국방일보에 감사한다. 생활관 동기들, 지원대 선후임들, 많은 깨달음을 주신 간부님들, 스쳐가는 인연이었을지라도 만났던 1000여 명의 특기병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손경환 대위, 복무 중인 친구들 모두 응원한다. 모두 자기만의 ‘일상의 환상’을 찾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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