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교수실에서

[반기현 교수실에서] 로마 제국 군대는 왜 강력했는가?

입력 2021. 12. 13   16:28
업데이트 2021. 12. 13   16:31
0 댓글

반기현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반기현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기원전 8세기 중반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로마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지중해를 ‘우리 바다(mare nostrum)’로 부를 정도의 제국으로 성장했다. 2세기 초 로마 제국은 동으로는 티그리스강, 서로는 대서양, 남으로는 사하라 사막, 북으로는 스코틀랜드 남부와 라인강 및 도나우강 일대를 경계로 하는 대제국을 이뤘다.

2200년이 넘는 역사에서 로마의 군대는 국가의 방위와 안녕 유지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세기 무렵 로마는 40만 명이라는, 전체 인구의 0.7%에도 못 미치는 병력으로 광활한 제국의 변경을 방어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첫째, 효과적인 보조군 운용 및 시민권 정책이다. 로마군은 크게 군단과 보조군으로 나뉘었는데, 비율은 1대1~1.5 수준이었다. 전자가 주로 로마 시민권자로 구성됐다면, 후자는 비시민권자로 구성돼 있었다. 물론 군단병으로 복무한 비시민권자와 보조군 병사로 복무한 시민권자도 존재했다.

보조군은 중장보병 위주의 군단이 취약한 기병·궁병·수병 등을 담당했다. 비시민권자 출신 병사는 입대와 동시에 로마식 이름을 받았으며 같은 로마군으로서 시민권자 출신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모병제가 기본인 로마군에 비시민권자들은 어느 정도 체격조건만 갖추면 적극적으로 자원했다.

둘째, 개방적인 신무기 도입이다. 로마인들은 적들이 모시던 신들도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판테온(만신전)에 모실 정도로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찬가지로 적들이 사용하던 무기도 유용하다고 판단되면 약간의 개조만 거쳐 자신들의 무기로 삼았다. 로마군을 대표하는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글라디우스’ 검과 ‘스쿠툼’ 방패가 대표적인 사례다.

흥미로운 사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갑을 두르고 마갑까지 갖춘 페르시아식 중장기병을 ‘찜통 운반자’라고 깔보던 로마군이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형태의 중장기병을 운용했다는 것이다.

셋째, 실전 같은 평시 훈련이다. 서기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로마군의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전투’와 같고 실전은 ‘피 흘리는 훈련’과 같다고 묘사했다. 엄격한 군율을 바탕으로 평시에도 실전 같은 훈련을 반복했기 때문에 전시에 100%의 전투력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훈련이란 개인 훈련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전술 훈련도 의미했다. 로마군의 훈련은 4세기경 “평화를 원하는 자는 전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베게티우스의 『군사학 논고』를 통해 한층 더 유명해졌다.

6세기 말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키우스와 10세기 초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6세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군사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마다 베게티우스를 인용했다. 16세기 초 피렌체 공화국의 마키아벨리도 프랑스나 신성로마제국 같은 강대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시민군에 바탕을 둔 강력한 군대를 꿈꿨고, 특히 평시 군사 훈련을 강조하며 베게티우스를 인용했다.

마지막으로 지역사회의 각종 기반시설 건설에 대한 로마군의 기여다. 로마군은 주둔 지역 인근의 공공시설 건설 및 유지·보수에 동원됐으며, 이들이 건설한 도로·수로·목욕장 등의 시설은 민간인들도 이용 가능했다. 기반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군 주둔지 주변에 현금력을 갖춘 군인들을 상대로 경제활동을 하는 지역사회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공동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사회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렇듯 로마군의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는 군에 대한 민간인들의 인식을 새롭게 했다. 그렇게 점령군으로 들어왔던 로마군은 점차 지역사회의 수호자이자 괜찮은 직업군으로 기능하게 됐다. 이러한 이유로 로마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국의 영속적인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