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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1950년 11월 27일 장진호전투 시작

입력 2021. 11. 25   14:54
업데이트 2021. 11. 25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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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1사단 장병들이 장진호 전투가 시작된 11월 27일 전차와 함께 눈 덮인 벌판을 횡단하고 있다. 미 해병대 자료사진
미 해병1사단 장병들이 장진호 전투가 시작된 11월 27일 전차와 함께 눈 덮인 벌판을 횡단하고 있다. 미 해병대 자료사진


6·25전쟁의 여러 전투 중 가장 치열하고 또 참혹했던 싸움으로 알려진 장진호 전투가 1950년 11월 27일(또는 26일) 시작됐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북진하던 미 해병 제1사단이 개마고원 장진호(長津湖)에 이르러 중공군과 최악의 전투를 치렀다. 중공군은 미 해병 1사단의 10배가 넘는 13만여의 엄청난 병력으로 공격했다. 살인적인 추위도 미 해병대를 끝까지 괴롭힌 적 아닌 적이었다. 장진호 일대는 험준한 고산지대로 한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갔다.


미 해병1사단이 12월 11일 함흥에 도달할 때까지 미 해병대는 전사 463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 동상 등 비전투 손실 3695명의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중공군 9병단 전체가 재편성을 해야 할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며 결국 미 해병대의 명예를 지켜냈다. 양 강대국의 자존심을 건 대결은 결국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다음은 국방일보 2011년 기획 ‘다시쓰는6·25전쟁’ 중 제42회 장진호 전투(1월 10일자, 김병륜기자) 기사 전문이다. 


1950년 11월 25일 평안북도 일대에서 미8군을 포위하기 위한 중공군 2차 공세가 시작되는 그 순간에도, 함경도의 미10군단은 상황을 낙관했다. 정면에 대규모 중공군이 없다고 판단한 10군단은 오히려 미8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도 공세작전을 시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10군단의 주축인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를 거쳐 서북쪽으로 진격, 중공군에 압박을 가하면 미8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잘하면 미 해병1사단이 중공군을 거꾸로 포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27일 미 해병1사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무언가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을 때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선두부대인 미 해병1사단 5연대가 함남 장진군 유담리에서 27일 오전 8시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중공군의 박격포와 수류탄 세례를 받았다.


▶ 중공군의 노림수  


27일 밤부터 상황은 악몽으로 변했다. 중공군이 미 해병5연대가 포진한 유담리를 포위했고, 미 해병1사단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후방의 장진군 하갈우리 주변의 도로도 차단했다. 


상황은 분명했다. 미8군처럼 미 해병1사단도 포위를 당한 것이다. 미 해병1사단으로선 중공군 병력이 얼마나 많은지, 중공군의 포위망이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미 해병1사단은 황초령 고갯길 전후부터 장진호까지 좁고 험한 산길을 따라 부대가 분산돼 있었다. 이렇게 분산 배치된 미 해병1사단 예하부대들이 압도적인 수의 중공군에 의해 포위당한 것이다.


미10군단이 공세작전을 시작할 무렵 중국은 장진호 주변 일대에 9병단장 송시륜 장군이 지휘하는 20ㆍ26ㆍ27군 등 3개 군단급 부대를 투입했다. 이들 중공군 3개 군단 예하의 총 12개 사단 중 8개 사단이 실제 포위 작전에 투입됐다.


중공군 편제에서 병단은 우리나라의 야전군을 의미하므로 미 해병1사단을 잡기 위해 중공군은 야전군 규모의 부대를 투입한 셈이다. 중국은 미국 지상군 중 최정예 사단 중 하나로 평가받는 미 해병1사단을 포위ㆍ섬멸해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싶어 했다. 중국이 미국의 최정예 사단 하나를 잡을 수 있다면 단순히 1개 사단을 격파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 의미가 큰 일대 사건이 될 터였다.


▶ 사상 최악의 악조건


28일 미 해병1사단은 우선 저 멀리 동해안 함흥까지 이어지는 총 56㎞에 이르는 기나긴 보급로의 상황을 먼저 체크해야만 했다. 이미 공격은 불가능했고, 보급로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이틀 뒤인 30일 결국 미 해병1사단은 후방으로의 철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함흥으로 철수하는 작전은 공격만큼이나 어렵고 위험한 임무였다. 유담리·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 등 이름조차 생소한 작은 마을들을 따라 함흥까지 이어지는 도로 주변의 산들은 높았고, 계곡은 깊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곳곳에서 길을 가로막았다. 휘어지고 굽이치는 길은 간신히 통행할 지경이었고, 그나마 대부분 갈림길도 없는 외길이었다. 


더구나 이미 5연대와 7연대 등 해병1사단 주력병력이 위치한 유담리부터가 포위당한 상태였다. 당장 눈앞의 적을 뚫고 후퇴하더라도 고개마다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의 4중ㆍ5중 포위망을 차례로 돌파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더욱 고약한 것은 살인적인 추위였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추위 속에 동상 환자는 속출했다. 전사한 시체는 순식간에 벽돌처럼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시체를 방어진지 보강용 엄폐 벽으로 사용할 만큼 철수 작전의 상황은 처절했다.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전사자가 쏟아졌지만 미 해병1사단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미 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누구보다 의연했다. 스미스 소장은 "후퇴가 아니라 또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이라며 철수 작전에 명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 미 해병대의 자존심


중국은 12월 4일 관영언론을 동원해 "미국 해병1사단 포위 섬멸 임박"이라고 선전을 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도 미 해병1사단의 위태로운 운명에 대해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1개 사단의 철수 작전이 아니라 미ㆍ중 양 강대국의 자존심 싸움으로 판이 커졌다.  


하지만 미 해병1사단 5연대와 7연대는 1차 포위망을 뚫고 12월 4일 천신만고 끝에 사단본부가 위치한 하갈우리에 도달했다. 12월 5일 미군 지휘부는 미 해병1사단에 하갈우리에서 항공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하갈우리에 건설된 야전 비행장을 통해 수송기로 철수하자는 것이 지휘부의 의도였다.  


하지만 미 해병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항공 철수 제안을 거부했다. 항공 철수를 위해서는 이륙하는 항공기를 엄호하기 위해 최후 순간까지 비행장 외곽을 방어할 1개 대대의 병력이 필요했다. 아군 본대의 철수를 기다리며 후방 고토리에서 도로를 확보하고 있는 1개 대대도 문제였다. 사단 본대가 항공기로 철수해 버리면 마지막까지 남게 될 2개 대대의 운명은 전사냐 혹은 포로냐 하는 선택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2개 대대 병력을 희생양 삼아 사단 본대가 비행기로 철수하는 방식은 명예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미 해병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 큰 희생이 있더라도 미 해병대는 명예로운 방식의 철수 작전을 원했다. 결국 스미스 소장은 지상 돌파를 결정했다. ‘철수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향한 공격’이라는 명예로운 다짐과 함께 미 해병대는 철수 작전을 계속했다.


12월 7일 고토리에 도달한 미 해병1사단 주력부대는 마지막 고비인 황초령에서 또다시 좌절을 해야 했다. 황초령의 험준한 계곡도 문제였지만 수문교가 붕괴돼 차량통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송기를 동원해 철제 부교를 공중 투하하는 등 결사적인 지원 노력으로 마침내 미 해병1사단은 포위망을 뚫었다.


미 해병1사단이 12월 11일 함흥에 도달할 때까지 전사 463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 동상 등 비전투 손실 3695명의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지만 미 해병1사단은 결국 명예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오히려 중공군은 9병단 전체가 재편성을 해야 할 만큼 치명적인 피해를 당했다. 양 강대국의 자존심을 건 대결은 결국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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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대규모 피해

전쟁 향방에도 영향


미국에서는 장진호 전투를 초신 전투(Battle of Chosin)라고 부른다. 초신이라는 이름은 전투가 벌어진 장소의 지명인 장진(長津)을 일본식 발음으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 당시 미군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작성한 지도를 토대로 군사지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한국식 발음이 아닌 일본식 한자 발음으로 지명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1사단이 압도적으로 병력이 많은 중공군을 상대로 싸워 포위망을 뚫은 전투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이처럼 장진호 전투는 워낙 상징적이고 유명한 전투여서 미 해군 군함 중에도 초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군함들이 많다. 미국의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 순양함인 CG-65 초신함이 대표적이다.


장진호 전투는 전쟁 자체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결과적으로 1개 사단이 야전군 규모의 중공군이 다른 작전에 투입되지 못하게 붙들었다는 점에서 전쟁의 향방에도 큰 영향을 미친 전투로 평가되는 것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인해 그해 12월 31일부터 시작해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점령했던 제3차 공세에 참가하지 못했다"며 "그 점을 고려하면 장진호 전투의 전략적 의미는 더욱 크다"고 평가한다. 김병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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