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서버 감시·보고 등 전통적 임무 줄고
정부 기능 유지·인권 감시 등 복잡화
1989년부터 5년간 임무단 수요 급증
참여 인원 1만→7만여 명으로 확대
유엔 가입 직후 PKO 참여의사 물어
국방부 참여가능부대 규모(안) 작성
1992년 대통령 재가 얻어 유엔 전달
우리나라 평화유지활동 역사 시작
1993년 소말리아에서 유엔 평화유지활동을 수행한 상록수부대 선발대 출국행사 모습.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직후 유엔은 대한민국 정부에 PKO 참여 의사를 물었고, 1992년 국방부가 작성한 PKO 참여가능부대 규모(안)이 대통령 재가를 얻어 유엔에 전달되면서 우리나라의 평화유지활동 역사가 시작됐다.
국방일보 DB
앙골라 꾸이마 교량 복구공사 작업에 땀을 흘리고 있는 국군 장병들. 우리 군은 1995년 10월부터 1996년 12월까지아프리카의 유엔 앙골라 활동단에 교량건설 공병대대를 파견했다. 출처=국군50년사
평화유지활동(PKO·Peace Keeping Operations)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지구상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정착해야 한다는 인류의 ‘공동선(Collective Good)’에서 출발한다.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은 194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중동지역에 유엔 예루살렘 정전감시단을 창설해 비무장 군의 옵서버(Military Observer) 투입을 결의하면서 시작됐다.
PKO 임무와 활동은 1991년 소련 해체에 따른 냉전 종식과 함께 급격히 전환됐다. PKO는 군 옵서버를 통해 감시와 보고 임무를 수행하던 전통적인 임무에서 다차원적 임무로 그 기능이 확장됐다. 즉 정부의 기능 유지부터 인권 감시, 치안 개혁, 전투원의 무장해제·동원해제·재통합 등 광범위하고 복잡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요구받았다.
냉전 종식 직후인 1989년부터 1994년 사이 5년간 PKO 임무단 수요는 급격히 증가했다. 유엔 안보리 이사국들은 예전과 달리 거부권 행사 없이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5년 동안 20개의 새로운 PKO 임무단이 창설됐고, PKO 참여 인원도 이전의 1만1000여 명에서 7만5000여 명 수준으로 대폭 증가했다.
한편 1990년대 세계 정세는 대규모 전쟁 발발 가능성이 현저히 감소했다. 그러나 민족, 종교, 영토, 자원 등의 갈등으로 인한 지역적 차원의 소규모 분쟁이 증대됐다. 이에 따라 유엔을 중심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이 더욱 중요시됐으며, 전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해 각국 상호 간 경제교류와 평화협조의 분위기가 확산됐다. 그 결과 1995년 7월 말 당시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에는 전 세계적으로 84개국에서 6만7000여 명이 참여했다.
1990년대 국군의 평화유지활동 참여
한국이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하게 된 시기는 소련이 해체된 1991년이었다. 1991년 9월 12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는데, 유엔은 그 직후에 우리 정부에 PKO 참여 의사를 묻는 설문서를 발송했다. 이 설문서는 1991년 11월 국방부로 검토·요청됐고, 국방부는 약 4개월 동안 검토해 PKO 참여가능부대 규모(안)를 작성했다. 이 규모(안)는 1992년 9월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유엔에 공식 통보됐다. 이때 통보된 참여 가능 부대 규모는 보병 1개 대대 540명, 의료지원단 154명, 옵서버 36명이었다. 이로써 우리 정부의 평화유지활동 역사가 시작됐다.
한국의 평화유지군이 처음으로 해외에 파병된 시점은 1993년 7월이었다. 국방부는 유엔 소말리아 활동단에 건설공병부대 ‘상록수부대’를 최초로 파견해 도로공사, 관개수로공사 등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1994년 9월에는 아프리카 서부사하라에 국군의료지원단 42명을 파견했다. 국군의료지원단은 중앙진료소 1개와 전방진료소 3개를 운용하면서 PKO사령부와 군 감시단에 의료지원을 진행했다.
평화유지활동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1995년 10월에는 아프리카의 유엔 앙골라 활동단에 교량건설 공병대대를 파견했다. 앙골라 PKO 공병대대는 교량복구, 도로보수 등 앙골라의 국가재건활동에 참여했다. 1996년에는 앙골라 PKO 사령부에 다시 장교 6명을 파견했다.
국군의 평화유지활동 중 군 감시단 참여는 1994년 10월 개시됐다. 국방부는 독립국가연합(CIS) 중 하나인 조지아(그루지아) 정전감시단에 최초로 5명의 소령급 장교를 파견했다. 이어서 1994년 11월에 인도·파키스탄 군 감시단에 다시 6명의 장교를 파견해 양국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에서 정전감시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1990년대 중반부터 군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PKO 관련 주요 직위에 활발하게 진출했다. 1995년 11월에는 육군대령 1명이 인도·파키스탄 군 감시단에 부단장으로 진출했고, 1996년에는 전직 장관 1명이 키프로스의 유엔 특사로 파견됐다. 1997년에는 육군소장 1명이 인도·파키스탄 군 감시단 단장으로, 전직 대사 1명이 크로아티아의 유엔 특사로 진출했다.
우리나라는 평화유지군과 군 감시단의 활발한 파견과 모범적 활동에 힘입어 유엔에서 국가 위상이 제고됐다. 그 결과 1996년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됨으로써 유엔의 중요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게 됐다.
미래 평화유지활동 기반 구축
이와 함께 우리 군은 탈냉전 이후 PKO 소요가 증대되는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 PKO를 위한 장기적 기반을 구축했다. 먼저 유엔은 1994년 6월 평화유지군과 군 감시단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우리 군에 유엔 PKO 상비체제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는 유엔 요청에 따라 1995년 3월 PKO 상비체제에 800여 명 규모로 참여한다는 방침을 유엔에 통보했다.
우리나라의 PKO 상비체제 참여 규모는 보병 1개 대대 540명, 중건설 공병 1개 중대 130명, 의료지원단 70~80명, 폭발물처리 2개 팀 11명, 해난 구조원 10~11명, 옵서버 36명으로 구성됐다. 이로써 국군은 유엔의 참여 요청이 있을 경우 국익, 안전, 안보 상황, 국민적 지지, 국내법 절차 등을 고려해 PKO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정책 기조를 유지하게 됐다.
또 국방부는 1995년 8월에 PKO 업무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유엔 평화유지활동 업무규정’을 제정했다. 이 규정에는 PKO 파견정책 결정부터 교대와 철수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 업무수행 지침과 절차가 규정됐다.
우리 군은 평화유지활동 참여 역사가 비교적 짧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경험과 자료가 부족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국방부는 보다 효율적으로 PKO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풍부한 경험이 축적된 해외 교육기관에 우리 요원을 파견하는 한편 국내 교육기반을 내실 있게 다져 나갔다.
국방부는 1995년부터 국방참모대학을 전담교육기관으로 지정했다. 국방참모대학에서는 분쟁지역 사전 연구와 평화유지활동 참가 요원 교육을 전담했고, 국제기구와 각국으로부터 입수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존안했다. 주기적으로 PKO 세미나를 개최해 PKO 정책발전을 도모했다.
한편 국방부는 PKO 전문요원을 양성하기 위해서 1993년부터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북유럽 유엔교육센터(UNTC)에 장교를 파견했다. 1995년부터는 캐나다 피어슨 평화유지교육원(PPC), 폴란드 평화유지교육원에 장교와 관련 공무원을 파견해 1997년까지 32명의 전문요원을 확보했다. 아일랜드 평화유지 교육원에도 장교를 파견해 전문요원을 양성했다.
이와 같은 유엔 평화유지활동은 6·25전쟁 당시 유엔의 지원 아래 국난을 극복했던 우리나라가 이제 유엔 수혜국이 아니라 지원국이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는 그동안 꾸준히 성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우리 군이 국제평화유지군으로서 진일보한 모습을 국내외에 보여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옵서버 감시·보고 등 전통적 임무 줄고
정부 기능 유지·인권 감시 등 복잡화
1989년부터 5년간 임무단 수요 급증
참여 인원 1만→7만여 명으로 확대
유엔 가입 직후 PKO 참여의사 물어
국방부 참여가능부대 규모(안) 작성
1992년 대통령 재가 얻어 유엔 전달
우리나라 평화유지활동 역사 시작
1993년 소말리아에서 유엔 평화유지활동을 수행한 상록수부대 선발대 출국행사 모습.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직후 유엔은 대한민국 정부에 PKO 참여 의사를 물었고, 1992년 국방부가 작성한 PKO 참여가능부대 규모(안)이 대통령 재가를 얻어 유엔에 전달되면서 우리나라의 평화유지활동 역사가 시작됐다.
국방일보 DB
앙골라 꾸이마 교량 복구공사 작업에 땀을 흘리고 있는 국군 장병들. 우리 군은 1995년 10월부터 1996년 12월까지아프리카의 유엔 앙골라 활동단에 교량건설 공병대대를 파견했다. 출처=국군50년사
평화유지활동(PKO·Peace Keeping Operations)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지구상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정착해야 한다는 인류의 ‘공동선(Collective Good)’에서 출발한다.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은 194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중동지역에 유엔 예루살렘 정전감시단을 창설해 비무장 군의 옵서버(Military Observer) 투입을 결의하면서 시작됐다.
PKO 임무와 활동은 1991년 소련 해체에 따른 냉전 종식과 함께 급격히 전환됐다. PKO는 군 옵서버를 통해 감시와 보고 임무를 수행하던 전통적인 임무에서 다차원적 임무로 그 기능이 확장됐다. 즉 정부의 기능 유지부터 인권 감시, 치안 개혁, 전투원의 무장해제·동원해제·재통합 등 광범위하고 복잡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요구받았다.
냉전 종식 직후인 1989년부터 1994년 사이 5년간 PKO 임무단 수요는 급격히 증가했다. 유엔 안보리 이사국들은 예전과 달리 거부권 행사 없이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5년 동안 20개의 새로운 PKO 임무단이 창설됐고, PKO 참여 인원도 이전의 1만1000여 명에서 7만5000여 명 수준으로 대폭 증가했다.
한편 1990년대 세계 정세는 대규모 전쟁 발발 가능성이 현저히 감소했다. 그러나 민족, 종교, 영토, 자원 등의 갈등으로 인한 지역적 차원의 소규모 분쟁이 증대됐다. 이에 따라 유엔을 중심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이 더욱 중요시됐으며, 전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해 각국 상호 간 경제교류와 평화협조의 분위기가 확산됐다. 그 결과 1995년 7월 말 당시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에는 전 세계적으로 84개국에서 6만7000여 명이 참여했다.
1990년대 국군의 평화유지활동 참여
한국이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하게 된 시기는 소련이 해체된 1991년이었다. 1991년 9월 12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는데, 유엔은 그 직후에 우리 정부에 PKO 참여 의사를 묻는 설문서를 발송했다. 이 설문서는 1991년 11월 국방부로 검토·요청됐고, 국방부는 약 4개월 동안 검토해 PKO 참여가능부대 규모(안)를 작성했다. 이 규모(안)는 1992년 9월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유엔에 공식 통보됐다. 이때 통보된 참여 가능 부대 규모는 보병 1개 대대 540명, 의료지원단 154명, 옵서버 36명이었다. 이로써 우리 정부의 평화유지활동 역사가 시작됐다.
한국의 평화유지군이 처음으로 해외에 파병된 시점은 1993년 7월이었다. 국방부는 유엔 소말리아 활동단에 건설공병부대 ‘상록수부대’를 최초로 파견해 도로공사, 관개수로공사 등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1994년 9월에는 아프리카 서부사하라에 국군의료지원단 42명을 파견했다. 국군의료지원단은 중앙진료소 1개와 전방진료소 3개를 운용하면서 PKO사령부와 군 감시단에 의료지원을 진행했다.
평화유지활동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1995년 10월에는 아프리카의 유엔 앙골라 활동단에 교량건설 공병대대를 파견했다. 앙골라 PKO 공병대대는 교량복구, 도로보수 등 앙골라의 국가재건활동에 참여했다. 1996년에는 앙골라 PKO 사령부에 다시 장교 6명을 파견했다.
국군의 평화유지활동 중 군 감시단 참여는 1994년 10월 개시됐다. 국방부는 독립국가연합(CIS) 중 하나인 조지아(그루지아) 정전감시단에 최초로 5명의 소령급 장교를 파견했다. 이어서 1994년 11월에 인도·파키스탄 군 감시단에 다시 6명의 장교를 파견해 양국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에서 정전감시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1990년대 중반부터 군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PKO 관련 주요 직위에 활발하게 진출했다. 1995년 11월에는 육군대령 1명이 인도·파키스탄 군 감시단에 부단장으로 진출했고, 1996년에는 전직 장관 1명이 키프로스의 유엔 특사로 파견됐다. 1997년에는 육군소장 1명이 인도·파키스탄 군 감시단 단장으로, 전직 대사 1명이 크로아티아의 유엔 특사로 진출했다.
우리나라는 평화유지군과 군 감시단의 활발한 파견과 모범적 활동에 힘입어 유엔에서 국가 위상이 제고됐다. 그 결과 1996년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됨으로써 유엔의 중요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게 됐다.
미래 평화유지활동 기반 구축
이와 함께 우리 군은 탈냉전 이후 PKO 소요가 증대되는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 PKO를 위한 장기적 기반을 구축했다. 먼저 유엔은 1994년 6월 평화유지군과 군 감시단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우리 군에 유엔 PKO 상비체제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는 유엔 요청에 따라 1995년 3월 PKO 상비체제에 800여 명 규모로 참여한다는 방침을 유엔에 통보했다.
우리나라의 PKO 상비체제 참여 규모는 보병 1개 대대 540명, 중건설 공병 1개 중대 130명, 의료지원단 70~80명, 폭발물처리 2개 팀 11명, 해난 구조원 10~11명, 옵서버 36명으로 구성됐다. 이로써 국군은 유엔의 참여 요청이 있을 경우 국익, 안전, 안보 상황, 국민적 지지, 국내법 절차 등을 고려해 PKO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정책 기조를 유지하게 됐다.
또 국방부는 1995년 8월에 PKO 업무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유엔 평화유지활동 업무규정’을 제정했다. 이 규정에는 PKO 파견정책 결정부터 교대와 철수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 업무수행 지침과 절차가 규정됐다.
우리 군은 평화유지활동 참여 역사가 비교적 짧았기 때문에 초기에는 경험과 자료가 부족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국방부는 보다 효율적으로 PKO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풍부한 경험이 축적된 해외 교육기관에 우리 요원을 파견하는 한편 국내 교육기반을 내실 있게 다져 나갔다.
국방부는 1995년부터 국방참모대학을 전담교육기관으로 지정했다. 국방참모대학에서는 분쟁지역 사전 연구와 평화유지활동 참가 요원 교육을 전담했고, 국제기구와 각국으로부터 입수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존안했다. 주기적으로 PKO 세미나를 개최해 PKO 정책발전을 도모했다.
한편 국방부는 PKO 전문요원을 양성하기 위해서 1993년부터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북유럽 유엔교육센터(UNTC)에 장교를 파견했다. 1995년부터는 캐나다 피어슨 평화유지교육원(PPC), 폴란드 평화유지교육원에 장교와 관련 공무원을 파견해 1997년까지 32명의 전문요원을 확보했다. 아일랜드 평화유지 교육원에도 장교를 파견해 전문요원을 양성했다.
이와 같은 유엔 평화유지활동은 6·25전쟁 당시 유엔의 지원 아래 국난을 극복했던 우리나라가 이제 유엔 수혜국이 아니라 지원국이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는 그동안 꾸준히 성장한 국력을 바탕으로 우리 군이 국제평화유지군으로서 진일보한 모습을 국내외에 보여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국가적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