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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에도 임무 수행 열정
절기상 더위가 가시고, 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는 처서(處暑)가 3주 넘게 지났는데도 한낮 최고기온이 30도를 넘는 더위가 백마고지를 휘감았다. 장병들은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맡은 임무에 전념했다. 선배 전우들을 가족 품으로 모시겠다는 장병들의 의지는 더위보다 뜨거웠다.
“대위 황상호 등 ○○명, 유해발굴 경계작전 투입 준비 끝!”
백마고지로 들어가는 통문 밖에 모인 5사단 비마대대 장병들이 투입 신고를 하며 임무 완수 의지를 다졌다.
장병들은 지휘관의 당부 사항을 경청한 뒤 작전 지역으로 향했다. 이들이 미리 약속된 장소에 도착해 경계하는 사이 기초·정밀 유해발굴, 지뢰제거를 할 장병들이 속속 도착했다.
백마고지 유해발굴 현장은 지난 6월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당시 수풀만 무성했던 곳에는 장병들이 안심하고 걸어갈 수 있는 이동로가 만들어졌다. 굴삭기 등 중장비를 동원해 중형 버스까지 이동 가능한 길도 닦고 있었다. 장병들이 작전지역까지 보다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모두가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장병들이 임무에 매진한 결과였다.
지뢰제거 장병들은 방호 헬멧·방호복·전투화 등 20㎏이 넘는 보호의를 착용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지뢰를 찾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지난 4월 시작한 이동로 정비 작업은 현재 62%의 진척률을 기록하고 있다.
지뢰제거 과정은 복잡했다. 장병들은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숀스테드(Schonstedt) 지뢰탐지기를 활용해 1차 탐지 후 예초기·송풍기·전지가위로 나뭇가지와 수풀을 제거했다. 이후 PRS-17K 지뢰탐지기로 2·3차 탐지를 하다 지뢰가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곳은 마크로포인터(금속이 묻혀 있는 곳에서 경고음을 내는 기구)·공압기(공기 압력으로 흙을 파는 기구)로 세심하게 살폈다.
지뢰제거작전 도중 유품이 나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한 장병이 땅속에서 소총 탄피를 발견하고 지니고 있던 봉지에 넣었다. 그곳에는 지난 1주일간 찾은 20여 발의 탄피가 들어 있었다.
모두가 70여 년 전 백마고지에서 있었던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들이다. 그만큼 장병들은 신중하게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지뢰제거가 끝난 곳에서는 유해발굴이 한창이었다. 헬멧에 주황색 위장포를 씌운 5사단 철권대대 장병들은 부지런히 삽과 호미를 움직였다. 검은색 조끼를 입은 국유단 장병·군무원들도 기초유해발굴 현장에서 대기했다. 이들의 주 임무는 기초발굴에서 발견된 유해·유품을 붓·치위생 기구 등을 이용해 최장 4주에 걸쳐 정밀발굴하는 것이다. 주위에는 경계 장병들이 북쪽을 응시하며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70년간 묻혀 있던 선배 전우에 죄송”
작전에 나서는 장병들은 임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고영인 대위는 “지난 4월 유해발굴 출정식 후 작전 첫날부터 수류탄·고폭탄 등 10여 발의 폭발물을 찾았다”며 “장병들이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장병들은 이동로 정비·지뢰제거 단계에서 2구의 부분 유해를 발굴했다. 고폭탄과 탄피, 유품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지난 5월 20일 18㎝ 길이의 아래턱뼈를 찾은 5사단 철권대대 김경준 병장은 “70여 년간 차디찬 땅속에 묻혀 있던 선배 전우를 생각하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며 “발굴 이후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각인했다”고 말했다.
경계작전 장병들의 수고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다른 제대보다 먼저 백마고지로 향한다. 임무에 투입되면 별다른 휴식시간이 없고, 식사도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 작전이 끝나면 투입할 때와 반대로 가장 늦게 현장을 떠난다.
5사단 비마대대 장인환 중사는 “임무 특성상 어려운 점도 분명히 있다”면서도 “그만큼 중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용사들을 다독이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백마고지 유해발굴 태스크포스(TF)는 장병들에게 최적의 임무 수행 여건을 제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정구호(대령) TF 단장은 “혹서기에는 온도를 수시로 측정해 작전시간을 조정하고, 온열 손상 예방 키트를 지급했다”며 “장병들이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고 작전에 임하는 점을 고려해 피로도를 낮출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 쓴다는 자부심으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국군9사단은 백마고지를 놓고 중공군과 열두 차례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다. 일곱 차례 주인이 바뀌는 혈전 끝에 9사단은 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 당시 아군과 적군을 합해 27만5000여 발의 포탄이 떨어져 고지는 민둥산으로 변했다. 하늘에서 봤을 때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여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백마고지전투는 6·25전쟁 중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던 전투로 손꼽힌다. 전사(戰史)에 따르면 우리 측 사상자만 3500여 명, 중공군 사상자·실종자는 1만여 명에 이른다. 이에 따라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유해가 발굴될 것으로 기대된다.
국방부에 따르면 화살머리고지에서는 1만㎡당 32.6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후방지역(1만㎡당 1.8구)에 비해 20배가량 높은 수치다. 완전유해 형태로 발굴된 비율도 후방지역에서는 전체 발굴유해 대비 6.5%였지만, 화살머리고지는 45%(424구 중 193구)를 차지했다.
비무장지대(DMZ) 유해발굴작전 TF장을 겸하고 있는 이상철(소장) 5사단장은 “백마고지 유해발굴작전은 9·19 군사합의에 따른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확대·추진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며 “장병들에게 ‘우리가 하는 일이 한반도 평화의 문을 열어가는 과정인 만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안전에 유의하며 임무를 완수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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