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인구 40만 텔아비브에 역사·군사박물관만 10여 개

입력 2021. 09. 15   16:32
업데이트 2021. 09. 1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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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스라엘 ②
 
육군박물관, 중동전쟁 생생히 전달
대학선 모국 방문 병영체험 행사도
뮌헨 테러사건 책임 통감한 서독
텔아비브 유스호스텔 건립해 헌정
건물 입구 기념 동판에 희생자 기록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지중해 해변 전경.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간 충돌이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지중해 해변 전경.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간 충돌이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네 차례의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이 노획한 아랍군의 소련제 무기·장비가 진열된 전시장.
네 차례의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이 노획한 아랍군의 소련제 무기·장비가 진열된 전시장.
1948년 독립전쟁 당시 집단으로 입대하는 이스라엘 여성들. 현재 이스라엘군의 35%가 여군이다.
1948년 독립전쟁 당시 집단으로 입대하는 이스라엘 여성들. 현재 이스라엘군의 35%가 여군이다.
텔아비브 대학에서 해외 유대인 청소년들이 병사들과 어울려 모국 방문 행사를 하는 모습.
텔아비브 대학에서 해외 유대인 청소년들이 병사들과 어울려 모국 방문 행사를 하는 모습.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선언과 동시에 7개 아랍국가와 전쟁에 휘말렸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80만 명으로 아랍의 5000만과 비교해 62분의 1에 불과했다. 이스라엘군은 봉급도 계급도 없는 무장단체 하가나(Hagana)가 아랍 정규군에 맞섰다. 1949년 7월 17일. 전쟁이 끝나자 유엔이 분할했던 최초 54%의 팔레스타인지역 유대인 땅이 78%로 확장됐다. 골다 메이어 전 이스라엘 총리는 “우리는 아랍을 상대하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에서 지면 끝장이라는 절박감이었다”고 술회했다.


뮌헨 테러 사건과 텔아비브 유스호스텔


사막 기후인 이스라엘에도 겨울철에는 폭우가 쏟아진다. 엄청난 강우량으로 텔아비브 시내 교통이 마비될 지경이다. 전철역 개찰구에서는 2명의 무장요원이 엑스레이(X-ray) 검색대의 승객 휴대전화를 유심히 관찰한다. 모든 역에 검색 인원을 배치한다면 인력 소요도 엄청날 것 같았다. 유대인들의 테러에 대한 예민함을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텔아비브 유스호스텔이 ‘뮌헨올림픽 테러 사건’ 기념 건물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1972년 9월 5일 새벽. 서독 뮌헨 올림픽선수촌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9월단’ 테러범 9명이 들이닥쳤다. 이스라엘 레슬링코치와 역도선수가 살해되고, 9명이 인질로 잡혔다. 이들은 이스라엘 정부가 체포한 팔레스타인인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골다 메이어 총리는 즉각 특공대 파견을 준비시켰다. 하지만 서독 정부는 이 계획을 거절하고 일반 경찰을 대신 투입했다. 엉성한 구출 작전으로 인질 전원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로 끝났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게릴라 기지를 폭격했고, 정보기관 모사드는 검은 9월단 핵심 간부 제거 작전을 시작했다. 1979년까지 해외에서 진행된 이 작전으로 20명 이상의 테러 관련자들이 사살됐다. 서독은 올림픽 테러 사건의 책임을 통감하면서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텔아비브 유스호스텔’을 건립해 이스라엘에 헌정했다. 이 건물 입구의 기념 동판에는 테러 사건 내용과 희생자 명단이 기록돼 있다.


작은 항구도시 텔아비브의 군사박물관

쉼 없이 내리는 비로 대부분 투숙객이 호텔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식당에서 유일한 동양인인 일본 대학생 ‘신타로’를 만났다. 그는 수차례 중국을 여행했지만, 북한에는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한반도 문제와 전쟁역사에 관심이 많은 그 청년은 텔아비브의 군사박물관 정보를 소상하게 알려줬다. 텔아비브는 인구 40만 명으로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두 번째 큰 항구도시다. 넓은 백사장을 끼고 쪽빛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수십 층 고급호텔들은 이스라엘의 풍요로움을 과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 구미시와 비슷한 인구를 가진 이 도시에 10여 개 역사·군사박물관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스라엘의 독립투쟁 무장단체 박물관

①하가나(Hagana)박물관: ‘하가나’는 이스라엘 독립 이전 무장단체로 현재 이스라엘군의 전신이다. 박물관 건물은 1930년부터 1945년까지 하가나 비밀본부였다. 1954년 옛 건물을 철거하려고 하자 하가나 출신 대원들이 몰려와 독립군 흔적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이곳은 박물관으로 개조돼 이스라엘 독립과정을 소개하는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②에트젤(Etzel)박물관: ‘에트젤’은 1931년 하가나에서 분리돼 ‘하가나 B’로 활동하다 1938년 에트젤로 개명했다. 이곳은 주로 1947년 아랍인과 영국군에 대항한 전쟁역사 자료를 전시한다. 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된 지휘관 베긴(Begin)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열정과 강한 행동력을 가진 군사조직이었다.

③레히(Lehi)박물관: ‘레히’는 은밀한 비밀작전을 수행하는 지하단체였다. 조직의 모토는 ‘부활’(이스라엘의 독립을 의미)이었고, 대대 규모로 편성됐다. 임무는 스파이 양성 및 적 조직 내 동조 세력 확보, 적 요인 암살이었다. 4층 빌딩의 전시실에는 신출귀몰했던 특수작전 사례와 다양한 첩보원 장비들이 있다.

④자파(Jaffa)해방기념관: ‘자파’는 텔아비브와 맞붙어 있는 지중해 해변 도시다. 1940년에는 이곳에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뒤섞여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대인들이 이 항구를 통해 대거 이주해 왔다. 두 민족은 첨예하게 대립했고, 팔레스타인인의 반유대인 무장폭동이 수시로 일어났다. 전시실에서는 유대인·팔레스타인인·영국군이 뒤엉켜 싸웠던 전투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풍부한 전쟁자료 가진 육군박물관

텔아비브의 육군박물관은 초라해 보여도 전시실 자료들은 네 차례의 중동전쟁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9개의 창고형 건물에는 전쟁기록 사진, 작전상황도, 전쟁영웅 활약상, 여군 병영생활 전시물이 가득하다. 1948년 독립전쟁 당시 급조한 무기·장비로 아랍 정규군을 격파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전쟁에 참여코자 여성들이 대거 병영으로 몰려가는 사진 또한 인상적이다. 총 들 힘만 있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선으로 달려가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현재도 이스라엘군의 35%인 6만5000명이 여군이다.

검은 안대를 쓰고, 최전선 병사들과 함께 풀밭에 주저앉아 양말을 갈아 신는 모세 다얀(Moshe Dayan) 장군 사진도 있다. 그는 14세에 하가나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 때 호주군 제7사단 소속으로 레바논 전투에 참전했다. 1941년 6월 8일. 정찰대원으로 프랑스 비시(Vichy)군 동태를 살피다 저격병 총탄에 왼눈을 잃었다.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다얀은 외눈을 가지고도 독립전쟁, 시나이전쟁 등 숱한 전투에 참전했다. 특히 1967년 6일 전쟁 당시에는 국방부 장관으로 아랍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야외 전시장에는 이집트·시리아·요르단군으로부터 노획한 소련제 탱크·야포·미사일이 줄지어 있다. 심지어 수백㎞ 적 후방지역 특공작전에서 확보한 장비까지 있다.


신세대 유대인의 애국심 고취 행사


텔아비브 대학에는 유대인 역사박물관과 국제금융기업가로 이스라엘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한 로스차일드(Rothschild) 기념관이 있다. 캠퍼스 분위기는 한국과 다를 바 없다. 넓은 잔디밭에서는 한 무리의 학생과 병사들이 어울려 단체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해외 유대인 청소년의 모국방문 병영체험 행사 중이란다. 신세대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병영과 대학생활을 경험하는 프로그램이다. 군복 입은 청년들이 대학생들과 캠퍼스 내에서 거리낌 없이 행사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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