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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K Angle] 우리 軍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미라클 작전’의 의미

김한나

입력 2021. 09. 15   10:00
업데이트 2021. 09. 2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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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軍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미라클 작전’의 의미
『ROK Angle』 9월호(한국국방연구원 발행)

김만기
국방부 국방정책실장


미라클 작전에 투입되었던 공군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KC-330)
미라클 작전에 투입되었던 공군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KC-330)


프롤로그(Prologue)

유엔과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6·25 전쟁의 비극을 극복한 우리나라는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바탕으로 ‘도움을 잊지 않고 도움을 주는 나라’로 변모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국력 성장에 상응하는 국제협력과 기여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번에 국방부가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 특별기여자 390명을 우리나라로 안전하게 이송한 ‘미라클 작전’은 우리 정부의 이러한 노력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군사외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미라클 작전은 2011년 수행된 ‘아덴만 여명 작전’과 함께 우리 군이 해외에서 군사력을 운용하여 성공한 역사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10년 전의 아덴만 여명 작전은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우리 선박 ‘삼호 주얼리호’와 선원들을 청해부대가 구출한 작전으로서 그 본질이 자국민 보호 작전이었다. 반면, 미라클 작전은 생사의 기로에 처한 아프간 국민들을 구출한 작전으로서 그 본질은 외국인 보호 작전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미라클 작전은 최근(‘21.7.2.)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한 것과 더불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한층 격상시킨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미라클 작전의 결정 배경과 수행 과정을 살펴보고, 그 성공 요인은 무엇이었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미라클 작전의 결정 배경

올해 4월 미국의 아프간 철수가 발표되면서 아프간 정세는 극도로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였는데 아프간 내 우리 정부기관 등에 근무했던 아프간인들은 탈레반의 테러 위협을 호소하며 주아프간대사관에 한국행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우리 국방부와 외교부 등 관련 부처는 아프간 특별기여자들과 그 가족을 국내 수용하는 데에 대한 논의에 착수하였다. 미군 철군 시한(8.31.)이 임박하면서 아프간 내 치안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우리 정부는 이들에 대한 국내 이송을 결정하였다. 국내로 이송키로 결정된 아프간인들은 바그람 병원, 주아프가니스탄대사관, 직업훈련원 등에서 의사, 간호사, IT 기술자, 행정직원, 통역, 강사 등 전문직 인력으로서 우리를 도와 수년간 협력을 제공한 사람들과 그 가족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우리를 도운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였듯이, 우리 정부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도주의 측면을 고려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동 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초에는 민항기를 이용하여 아프간 특별기여자와 가족들을 국내로 이송하려고 했다. 하지만 8월 15일(일) 탈레반이 아프간의 수도 카불을 점령한 이후, 카불 공항 내에 민항기 운항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함에 따라 군용기를 투입하여 이송하는 방향으로 작전 수행 방침을 급선회하였다.

아프간 특별기여자 이송 작전이 ‘미라클 작전’으로 명명된 배경에는 사선을 넘어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특별기여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바람과 적의 위협이 상존하는 가운데 왕복 2만여 km라는 원거리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우리 군의 작전 성공을 기원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다. 아프간 탈출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아프간 조력자들을 안전한 장소로 이송해야 한다는 우리 군의 사명감은 아프간인들에게는 삶에 대한 한 줄기 희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한편, 우리 특수임무단은 왕복 2만km 이상을 운항하여 그것도 극심한 정세 불안으로 언제 테러가 일어날지 모르는 곳에서 전례가 없는 작전을 수행하였다. 특수임무단의 성공적인 임무 완수를 기원한 우리의 염원은 기적의 결과로 돌아왔다.

미라클 작전의 수행 과정

국방부는 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국방부 업무 담당자와 공군 등 66명으로 구성된 특수임무단을 긴급 편성한 후,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KC-330) 1대와 수송기(C-130J) 2대를 현지에 투입하는 방안을 수립했다. 

다목적 공중급유 수송기(KC-330)는 민항기를 개조한 기종으로 공군이 보유한 항공기 중 가장 많은 인원을 수송할 수 있다. 군 수송기(C-130J)는 아프간 특별기여자들 및 특수임무단의 안전보장 목적으로 투입되었다. C-130J는 파키스탄에서 아프간으로 왕복 운항 시 아프간 탈레반 무장단체로부터 지대공 위협을 피할 수 있는 자체보호장비가 장착되어 있다. 

미라클 작전은 3단계로 이루어졌는데 단계별 작전수행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단계 작전은 8월 23일(월) 군 수송기를 중간 기착지인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착륙시키는 것이었다. 작전 투입 당시 아프가니스탄 주변 국가공항은 이미 다른 국가들의 후송작전이 전개되어 군 수송기의 이착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외교부 및 주파키스탄 대사관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한-파키스탄 공군총장 간 공조통화를 비롯해 양국 무관부 등 가용한 채널을 총동원하였다. 그리하여 8월 22일(일)에 극적으로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이슬라마바드 공항을 사용할 수 있다는 승인을 확보할 수 있었다.

2단계 작전은 아프간 카불로 군 수송기를 투입하여 아프간 특별기여자와 가족들을 8월 24일~25일 양일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로 이송하는 것이었다. 

우선 주UAE 무관과 아프간 대사관 직원들이 미 군용기를 타고 카불에 먼저 도착하여 임무 수행을 위한 사전 준비를 했다. 특히 카불 공항을 통제하는 미 중부사령부(CENCOM)와 실시간으로 연락하면서 카불 공항 이착륙에 필요한 사전비행승인(PPR : Prior Permission Required)을 적시에 확보하였다.

1일차 작전에서는 탈레반이 카불 공항 외부를 장악하여 공항 진입하는 데에 극심한 혼잡이 빚어졌다. 불과 26명의 아프간 특별기여자들만이 카불 공항으로 진입하여 이들 인원이 이슬라마바드로 이송되었다. 작전 수행이 순조롭지 않자 아프간 특별기여자 이송 인원이 채 100여 명도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낙담과 함께 작전의 장기화가 불가피하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그러던 중 2일차 작전에서 정말로 기적이 찾아왔다. 주아프간 현지 공관에서 외교 채널을 통해 아프간 현지 운송업체를 접촉한 후 버스 2대를 임차하여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을 카불 공항까지 수송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 방법은 ‘신의 한 수’였다. 신속히 연락체계를 가동하여 남아있는 364명의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을 새로운 집결지에 모이도록 하여 버스에 탑승시켰다. 문제는 버스가 공항에 진입할 때까지의 탈레반 요원들이 검문·검색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 또 한 차례의 기적이 찾아왔는데, 미군 측이 탈레반과 직접 협상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카불 공항 주변에서 14시간 동안 기다린 후 천신만고 끝에 카불 공항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카불 공항으로 들어온 364명의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은 C-130J를 이용해 이슬라마바드로 신속히 이송되었다.

3단계 작전은 390명의 인원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로부터 한국으로 이송하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는 최대한 신속하게 이송작전을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최대 탑승 인원이 300 여명인 KC-330에 아프간 특별기여자와 가족들 모두가 탑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5세 미만의 영유아가 100 여명에 달했기 때문에, 이들이 가족들과 분리되어 탑승하면 심리적 불안감이 커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결국 개인 수하물을 최소화하는 등 특단의 조치를 통해 탑승 인원을 최대로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총 377명이 KC-330에 탑승하여 8월 26일(목) 인천공항에 1차로 도착하였다. 이어 이슬라마바드에 남은 13명이 다음날 C-130J를 통해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미라클 작전의 성공요인

미라클 작전은 결코 행운이나 기적으로 우연히 성공한 것이 아니다.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임무 완수를 이끈 것으로 분석되었다. 주요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속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최상의 작전일(D-day)을 결정한 것이 금번 작전의 성공을 좌우했다. 미군 철군 시한(8.31.)을 기준으로 최대한 빨리 작전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방침이 정해짐에 따라 미라클 작전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자칫 이틀 정도만 더 늦었더라도 카불 공항 게이트 그 자리에서 발생한 폭발 테러로 공항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국방부 등 작전을 지휘하는 본부와 현지에 투입된 특수임무단 간 실시간 소통은 이송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국방부와 외교부 간 소통을 통해 주아프간대사관 직원들이 카불 공항에 먼저 들어가 작전 수행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할 수 있었고, 현지 공관에서 외교 채널을 가동하여 현지 운송업체와 버스 임차 계약을 통해 아프간 특별조력자들이 카불 공항에 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장 상황을 알 수 없는 본부에서는 특수임무단이 보내는 정보가 결정적이었는데,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현장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송한 특수임무단의 소중한 정보에 기초하여 작전 지휘본부는 신속하게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셋째, 동맹국인 미국의 전폭적인 협조는 미라클 작전의 성공을 이끈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이었다.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을 현지 카불 공항에 집결시키기 위해서는 카타르로 철수했던 주아프간대사관 직원들이 단시간 내 카불공항으로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미군은 주아프간대사관 직원 3명과 주UAE 무관이 신속하게 카불에 진입할 수 있도록 자국 군용기를 흔쾌히 사용토록 하였고, 이후 미라클 작전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또한 카불 공항 이착륙 등 공항 운용을 위해서는 미 중부사령부(CENCOM)의 사전비행승인(PPR)이 필수적이었는데, 미측은 우리가 수시로 요청한 PPR 승인을 모두 수용하였다. 이외에도 미측은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이 카불 공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현지 운송업체를 통해 버스 대절을 알선하였으며, 탈레반 측과 직접 협상하여 버스가 공항으로 안전하게 진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넷째, 동맹국인 미국의 협조뿐만 아니라 미라클 작전은 여타 우방국들과 협력국들의 국제공조가 없었다면 성공을 담보할 수 없었다.

영국과 캐나다 등 우방국들은 카불 공항 경계를 지원했고, 파키스탄 정부는 미라클 작전을 위한 이슬라마바드 공항 사용을 승인해 주었다. 인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등 8개국은 우리 군용기의 영공통과를 승인해주었다. 특히 태국은 우리 군 수송기가 김해와 이슬라마바드 간 왕복 약 33시간을 이동하는 동안 중간급유 등을 위한 중간기착지를 제공해주었다. 

한편 터키군은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이 우리 수송기에 탑승하기 전까지 약 4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본부 주변에 대기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것은 물론, 현장에서 밤샘한 한국군을 위하여 따뜻한 커피를 나누어 주어 진한 형제애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러한 사례를 종합해볼 때 미라클 작전은 국제사회의 책임감 있는 일원으로서, 우방국과 연대감을 재확인하고 상호협력의 중요성을 체감한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우리 작전 요원들의 헌신을 빼놓을 수 없다. 

파키스탄 현지에서 이송작전을 챙겼던 주파키스탄 무관은 작전 중 모친의 임종 소식을 들었지만 귀국하지 않고 작전에 임해 군인으로서 본분을 실천하였다. 우리 작전요원들은 아프간 현지인 이송을 위해 언제라도 즉시 출격할 수 있도록 40도 이상의 더위에서 10시간이 넘게 에어컨도 켜지 않고 항공기 시동 배터리를 절약하면서 준비태세를 갖추는 등 모든 어려움들을 스스로 이겨내었다. 또한 작전 임무를 신속하게 완수할 수 있도록 수송기 좌석을 탈거하여 탑승 공간을 늘리고 자신들은 한국행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에게 좌석을 양보하는 등 인도주의적인 배려를 하였다.

왕복 2만여 km의 장거리에 위치한 분쟁 지역에 군 수송기를 급파하여 단기간에 많은 인명을 구출한 미라클 작전은 국군 역사상 외국인을 보호하는 최초의 작전이었다. 그만큼 이번 아프간 특별기여자의 이송 작전명인 ‘미라클’이라는 이름은 우리 국민의 뇌리에 오래 각인될 것이라 믿는다.

에필로그(Epilogue)

미라클 작전은 개시 후 종료까지 총 5일이 걸렸다. 그 5일은 40년 가까이 군에 몸담아 온 필자에게 있어서 가장 긴장되고 극적인 순간이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작전을 지휘했고 24시간 비상연락망 체계를 가동했다. 또한 시차에 구애받지 않고 실시간 소통하여 현지로부터 작전 상황을 전달받고 신속하게 다음 지시를 내렸다. 

현장에 있는 임무단 만큼은 아니었지만, 한순간의 실기(失機)가 작전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압박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말 그대로 우리 군은 기적처럼 작전을 완수하였고, 우리 군용기가 인천공항에 처음으로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을 싣고 안전하게 도착했을 때는 연신 ‘감사하다’라는 말을 되뇌일 뿐 다른 말은 필요가 없었다. 이번 작전은 한마디로 ‘기적의 연속 그 자체였다.’

※ 본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한국국방연구원의 공식적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김한나 기자 < 1004103kh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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