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UN가입 30년과 軍 국제평화협력활동

병원 열어 6만 명 넘게 진료…공터 정비해 축구대회

서현우

입력 2021. 08. 17   16:11
업데이트 2021. 08. 1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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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아이티 단비부대 ④·끝 - 박성호 예비역 대령 (단비부대 2, 3진 단장)

재건 복구 활동 외 주민과 교류 심혈
중장비·태권도·한글 등 교육도 힘써
6·25전쟁 참전국 장병 부대 초청도
2년 10개월간 단비 같은 희망 선물

단비부대 2, 3진 단장이었던 박성호(앞줄 왼쪽) 예비역 대령이 당시 연합 임무 현장에서 스리랑카 평화유지군 지휘관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 제공=박성호 예비역 대령
단비부대 2, 3진 단장이었던 박성호(앞줄 왼쪽) 예비역 대령이 당시 연합 임무 현장에서 스리랑카 평화유지군 지휘관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 제공=박성호 예비역 대령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으로 아이티에서 임무를 수행한 단비부대는 재건 복구 활동 외에도 의료지원과 대민지원으로 주민들에게 힘이 됐다. 2010년 파병 초기 야전 텐트에서 의료지원을 시작한 부대는 이듬해 단비병원을 개원하고 철수 직전까지 활동을 이어가 6만 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했다. 또 대민지원 활동에도 적극 나서 주민들에게 중장비·태권도·컴퓨터 등을 교육하고, 어린이들에게 한글·영어·음악을 가르치며 희망과 웃음을 되찾도록 도왔다.

단비부대는 주민들과의 교류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개 초기부터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멈추지 않은 것. 아이티를 돕는 우리 군의 행동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주민들은 점차 우리 군의 정성을 알게 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단비부대장으로 활동했던 박성호 예비역 대령(당시 대령)은 부대-주민 간 교류를 넘어, 주민들 사이의 단합·통합도 추구했다.

“부대가 축구대회와 체육 행사 등을 개최한 이유입니다. 한편으로 부대원들과 주민들이 친목을 도모해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바랐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상처와 아픔을 겪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용기를 얻고 다시 일어서기를 희망했습니다.”

2011년 열린 단비부대장배 축구대회에는 지역 16개 클럽팀이 참가했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뛰었고, 주민들은 열띤 응원을 보내며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에 환호했다.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인 축구를 마음껏 즐기는 장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아울러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 그에 맞는 활동을 전개하며 소통·공감하려는 부대의 깊은 뜻이었다.

“우리 부대는 대회를 위해 마을 공터를 정비해 축구 경기장을 조성했습니다. 축구공을 비롯한 경기 용품도 제공했어요. 현지 언론에 소개됐고, 지역사회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호응을 보냈습니다.”

이 같은 활동은 현지 유엔임무단 사령부도 동의한 것이었다.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의 민사활동일지라도 현지 유엔임무단·타국 군 등과 조율·협업이 없다면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생각. 평화유지활동은 어느 한 국가, 한 부대가 독단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민사작전에서는 주민들의 필요·요구를 먼저 생각해 판단하고 이후 지역 정부, 유엔군사령부 등과 협력·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병작전과 의무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감하고 조율하며 협업을 이뤘던 점이 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던 배경이었습니다.”

단비부대는 타국 평화유지군과의 교류도 놓치지 않았다. 여러 교류 활동이 있었는데, 그의 기억에 가장 진하게 남은 행사는 6·25전쟁 참전국 장병 초청이었다.

“현지에 전개한 유엔 평화유지군 국가 중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도움을 준 나라 장병들을 부대로 초청했어요. 간단한 행사를 진행하면서 감사장을 전달했습니다. 우리를 도와줘 고맙다고 했어요.”

부대의 정성 어린 마음에 그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역사와 우정을 기억해줬다면서 오히려 고마워하더라고요. 손을 맞잡고 서로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마음이 짠해짐을 느꼈어요.”

그에게는 잊지 못할 경험이 하나 더 있다. 2진과 3진에서 단장직을 수행하는 중간에 잠시 귀국할 일이 있었다. 수개월 만에 갖는 휴식이기도 했고, 본국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도 있었다.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다시 아이티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국에서 출발해 미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아이티로 가는 여정. 전세기나 군용기가 아닌 민항기를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국적기로 기억합니다. 국내에서 아이티를 가려면 미국에서 외국 항공사를 이용해야 했거든요. 가장 저렴한 좌석에 앉았어요. 어서 부대로 복귀할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때 승무원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승무원은 전투복을 입은 그에게 다가와 인적사항이며 국적과 부대명을 물었다. 또 왜 아이티에 가는 것이고,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처음에는 낯선 동양인 군인이 수상하게 보여서 그런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승무원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단비부대원으로서 유엔 평화유지활동으로 아이티의 재건을 돕고 있으며, 본국에서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 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승무원은 자리를 떠났고, 얼마 뒤 기장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저에게 무료로 좌석 등급을 올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기장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헌신하는 분에게 조금이나마 베풀고 싶다고 했어요.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면서요. 손사래 치며 거절했는데, 주변 승객들까지 제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퍼스트 클래스로 옮겼어요.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단비부대는 마지막 진이 2012년 12월 24일 귀국·해단하며 임무를 마쳤다. 부대는 약 2년 10개월 동안 485건의 공병지원으로 도로·건물·시설을 재건·복구했다. 또 지하수 개발, 의료지원, 대민지원 등으로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주민들에게 부대는 그 이름처럼 꼭 필요한 때 맞춰 내린 단비였다.

“국가를 대표해 해외 작전을 수행한 일은 영광입니다. 내가 아닌 우리가 함께였기에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티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전 세계에 한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게 된 것은 부대원 한 명 한 명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당시 부대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서현우 기자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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