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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계 금동제·신라계 마구·일본계 토기 출토 찬란했던 ‘교역의 중심지’

박영민

입력 2021. 08. 17   17:07
업데이트 2021. 08. 1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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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송학동·내산리 고분군

송학동 14기 봉토분
독창적 묘제…유네스코 세계유산 추진
내산리 65기 봉토분
혈연공동체적 성격 다곽식 구조

고성 중심으로 한 소가야
진주·산청까지 세력 확장
중국·백제·일본 잇는 역할
유리 장신구·철기류 다량 출토


5~6세기에 조성된 소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인 송학동 고분. 사진=양동욱 기자
5~6세기에 조성된 소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인 송학동 고분. 사진=양동욱 기자


고분이란 봉토를 가진 큰 무덤으로 축조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장의 문화로서 동일 정치체 내에서는 유사한 축조방법과 유물 부장풍습을 공유했고, 교류의 흔적으로 외부의 장의 요소가 유입되기도 했다. 고성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분구묘와 채색석실 등이 그러한 것이다. 고성의 고분을 통해 소가야의 흔적을 찾아보자.
글=박영민/사진=양동욱 기자(항공사진=정종빈 기자)

고성 신용리 분묘에서 출토된 독널을 비롯한 소가야 시대의 토기들.사진=양동욱 기자
고성 신용리 분묘에서 출토된 독널을 비롯한 소가야 시대의 토기들.사진=양동욱 기자
낙동강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작은 나라를 형성한 변한의 제국들은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며 각각의 가야국으로 성장한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5세기 전반에는 ‘소가야 양식’이라 부를 수 있는 지역 특색을 갖춘 토기들이 등장한다. 고성을 중심으로 한 소가야는 사천을 포함한 남강 수계로 연결된 진주·산청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남해안의 해상교역로를 통해 중국, 백제, 왜(倭)와의 교역을 중개하는 등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한 교역의 중심지로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한다.

고성 송학동·내산리 고분군 등은 소가야 세력의 규모와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적들로 각종 유리 장신구, 철기류 등 위세품이 다량으로 출토돼 화려했던 고성의 소가야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후 소가야는 6세기 중엽 경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경남 고성군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언제 찾아도 좋은 고성읍 내 송학동 고분군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사적 제119호인 고분군은 고성여자중학교 뒤 일명 무학산 또는 무기산이라 불리는 구릉을 중심으로 있다. 소가야(小伽倻) 또는 고자국(固自國)으로 불리던 정치체제 지배자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송학동 고분군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야트막한 언덕 위로 봉긋봉긋 솟은 고분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고분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마치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온 듯 몸과 마음이 숙연해진다.
고성 송학동 고분의 목곽묘서 출토된 원통모양 그릇받침.사진=양동욱 기자
고성 송학동 고분의 목곽묘서 출토된 원통모양 그릇받침.사진=양동욱 기자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란 노래같이 이곳을 찾는 이들은 자신들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회귀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배자들의 무덤이라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아늑함을 엿볼 수 있다. 바쁜 일상 속 스트레스는 어느새 사라진다. 육지 속의 섬 같은 고분군은 일상의 번잡한 소음을 모두 멈추게 한다. 어디를 걸어도 넉넉함이 와 닿는다.

봉분 너머로 보이는 고성읍 내 시가지는 과거의 고분과는 달리 오늘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고분 둘레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사진 찍기 좋은 명소가 여러 곳 나온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다면 어디를 찍어도, 어떤 자세를 취해도 멋진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그렇게 서정적인 풍경 속을 걷다 보면 주변과 한 몸이 된 듯 녹아듦을 느낄 수 있다.

고성 내산리 8호분에서 출토된 가락바퀴. 솜이나 털 따위의 섬유로 실을 잣는 데 쓰는 가락에 끼워 그 회전을 돕는 바퀴다.사진=양동욱 기자
고성 내산리 8호분에서 출토된 가락바퀴. 솜이나 털 따위의 섬유로 실을 잣는 데 쓰는 가락에 끼워 그 회전을 돕는 바퀴다.사진=양동욱 기자
고성 송학동 고분군은 경남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 470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송학동과 기월리 일원에 총 14여 기의 봉토분이 남아있다. 1914년 일제 강점기 이후 3차례에 걸친 조사가 시행됐고 1999년 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3기가 중첩적으로 축조된 송학동 1호분과 기월리 1호분이 조사됐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 조성된 소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봉분을 먼저 조성하고 그 상부에 매장 주체부를 조성하는 분구묘의 전형이다. 매장 주체부의 구조는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묘가 조사됐다.

1999년 발굴조사 결과 영산강계 부군묘(1A호), 구주계 석실묘(1B호), 가야계 석실묘(1C호)가 차례로 축조돼 나타난 형태로 일본의 전방 후원분과는 다른 소가야의 독창적인 묘제였음이 드러났다.

송학동 고분군은 묘제를 통해 기술과 사상의 교류를 증명하는 탁월한 사례로 손꼽힌다. 소가야는 남해안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백제-가야-일본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남해안-남강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부상했다. 5세기 후반에는 바닷길을 이용한 교류도 활발해진다. 발굴조사로 출토된 백제계 토기와 금동제 고배, 신라계 장식 마구, 일본계 토기와 장식 마구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소가야의 고도인 고성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송학동 고분군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곳이다. 한낮 기온이 35도를 웃도는 더위에도 여행길에 짬을 내 가족과 함께 송학동 고분을 찾았다는 홍성하(분당 거주) 씨는 “언덕 위에 솟아있는 고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옛 가야인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고 하는데 꼭 이뤄지기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고성 내산리 고분군은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일대 야트막한 야산의 구릉에 65여 기의 봉토분이 조성돼 있다. 이 고분군은 고성 송학동 고분군과 함께 소가야를 대표하는 유적이며 일제 강점기에 실체가 확인돼 고적으로 관리돼 오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20호로 지정됐다. 1997년부터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연차 발굴조사됐는데, 봉분 지름 20m가 넘는 대형 분부터 10m 이하의 소형 분까지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고분군의 특징은 미리 흙이나 돌로써 봉분을 쌓아 올려 분구를 조성하고 그 위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분구묘 양식이다. 영남권에서 분구묘 양식이 발견된 경우는 고성지역이 유일하다. 대부분 수혈식 석곽묘로 한 봉분 내 여러 개의 석곽을 조성하는 다곽식으로 만들어졌다. 다곽식 구조는 가야시대 묘의 특징이기도 하면서 혈연공동체적 성격을 가지는 백제시대 묘와의 연관성도 보인다.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가야 후기의 토기 양식 외에 산라계 토기, 백제계 토기, 왜계의 마구류 등이 함께 보인다. 이는 6세기 전반기에 고분군을 축조한 정치세력이 해안에 근접한 지리적 조건을 배경으로 활발한 대외교류를 하면서 고성 송학동 고분군 세력과 함께 가야사를 주도했음을 보여준다. 또 고성 내산리 고분군의 주도 세력은 뱃길을 이용해 바다 건너 왜와 교류하고 육로를 통해서 다른 가야 및 백제 세력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이 고분군은 가야의 해상관문이었던 소가야의 찬란했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서진 항아리의 동체와 바리모양 그릇받침. 목과 입구 일부가 결실된 넓은 입 구멍단지, 연질소성의 단지 등 고성 기월리 1호분에서 출토된 토기들.사진=양동욱 기자
부서진 항아리의 동체와 바리모양 그릇받침. 목과 입구 일부가 결실된 넓은 입 구멍단지, 연질소성의 단지 등 고성 기월리 1호분에서 출토된 토기들.사진=양동욱 기자

고성지역 곳곳에는 소가야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다만 예로부터 사람이 살던 곳에 지금까지 지속해서 생활하다 보니 역사의 흔적들이 덧대어져 옛 모습은 사라지고 바뀌기도 했다. 송학동 고분군은 송학리·기월리 일대에 40여 기의 고분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사라지고 14여 기 정도만 남아있다. 또한, 행정구역상 구역이 나뉘어 명칭도 달리 불리게 됐다.

기월리 419-4번지 일대에 기월리 1호분(송학동 13호분)이라 불리는 1기가 2011년 발굴조사됐으나 대부분 파괴돼 유물도 8점만 출토됐다. 기월리 1호분에서 서남쪽으로 기월리 2호분(송학동 14호분)인 대형고분이 자리 잡고 있는데, 발굴조사되지 않아 밝혀지지 않은 고성 소가야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왕궁지, 토기 가마, 주거지, 생활유적 등 소가야 문화를 밝힐 수 있는 비밀들이 고성의 땅속에 아직도 묻혀 있다.

“아직 많은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채 고성 곳곳에 묻혀 있는데 체계적인 발굴 사업을 통해 우리 곁에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고성군청 문화관광과 이병윤 주무관(학예사)의 말처럼 숨겨진 소가야의 유산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 보자. 취재협조=고성박물관


박영민 기자 < p172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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