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100년 걸쳐 지은 대성당 옆엔 모진 풍파 이겨낸 첨탑

입력 2021. 06. 16   16:01
업데이트 2021. 06. 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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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스페인 세비야 ②
구도심 곳곳 서민 식사·휴식공간 ‘바르’
‘하루 5끼’ 먹는 전통 수백년째 이어져
 
1930년대 내전 상흔 박물관에 고스란히
이념 난립 원인…수십만 명 사망·망명

 
세비야는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발전한 도시다. 오페라 ‘카르멘’과 소설 『돈키호테』가 창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정치적 불안정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성모 마리아는 스페인 사람들이 갖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좋은 풍광, 아름다운 노래와 춤, 미모의 여인과 용감한 남성을 부탁하니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들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좋은 정부(政府)를 요구하자 당황한 성모 마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것만은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사들이 하루도 천당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비야 대성당 전경.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브라질 아파레시다 성모성당에 이어 세계 3번째로 큰 성당이다.  필자 제공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비야 대성당 전경.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브라질 아파레시다 성모성당에 이어 세계 3번째로 큰 성당이다. 필자 제공

이슬람교 기도 시간을 알려주던 세비야 대성당 옆 히랄다 첨탑 전경.  필자 제공
이슬람교 기도 시간을 알려주던 세비야 대성당 옆 히랄다 첨탑 전경. 필자 제공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비야 대성당

1492년 스페인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물러간 후 세비야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급부상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덕이다. 이 도시엔 신대륙에서 건너온 물자가 넘쳐났다. 세비야 구도심의 랜드마크는 대성당이다. 페르난도 3세가 세비야를 탈환한 후, 이슬람 회당을 허물고 대성당을 건축할 것을 지시했다. 1401년부터 짓기 시작한 성당은 100년의 세월을 거쳐 세상에서 가장 큰 덩치로 태어났다. 콜럼버스 무덤이 있는 세비야 대성당 한쪽에는 그의 관을 어깨에 둘러메고 허공에 떠 있는 네 명의 왕들이 있다. 왕의 발을 만지면 연인을 다시 찾게 되고, 부자가 된다는 속설에 유난히 발이 빛난다.

대성당 귀퉁이에는 한없이 우러러봐야 하는 30층 높이의 히랄다탑이 있다. 이슬람 기도 시간을 알리던 옛 첨탑이다. 가톨릭 군대가 세비야를 접수할 때 이슬람교도들은 유럽 최고 높이의 탑이 무참하게 허물어질 것을 염려했다. 그들은 조용히 물러가되 자신들이 스스로 부수고 가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페르난도 3세의 반응은 뜻밖에도 ‘행여 벽돌 한 장이라도 빼내면 이슬람교도 모두를 죽이겠노라’라는 엄포였다. 그 덕에 히랄다는 생채기 하나 없이 살아남았다.


오페라 ‘카르멘’의 무대 세비야 담배공장

대성당 옆 알카사르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궁전이다. 가톨릭 지배 이후 귀족들은 왕궁을 코앞에 둔 이곳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빼곡하게 들어선 집은 반듯했지만 길은 넓지 못했다. 좁디좁은 골목길 위의 돌출된 창틀에서 몸을 쭉 빼면 앞집 사람과 입맞춤도 충분해 ‘키스 골목’이라 부른다.

세비야는 잘 알려진 오페라 ‘카르멘’의 무대이기도 하다. 약혼녀가 있는 순진한 군인이 매력적인 집시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인생을 망치는 내용이다. 당시 담배는 신대륙에서 건너온 최고의 히트 상품이었다. 1726년 세비야 담배공장은 통풍도 안 되는 열악한 환경이었고, 작업자 대부분은 집시 여인이었다. 공장 경비병 ‘돈 호세다’는 앞길이 창창한 군인이었고, 아름다운 여직공 ‘카르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매력적인 이 여인이 던져준 꽃 한 송이 유혹에 돌부처 같았던 그의 마음은 흔들렸다. 폭행 사건으로 영창에 들어온 카르멘을 도망가게 만들고 대신 자신이 수감 되었다. 감옥 속에서도 그는 ‘당신이 던진 시든 이 꽃에서도 달콤한 사랑의 향기가 난다’라며 카르멘에게 푹 빠졌다. 그러나 결국 여자의 변심에 호세다는 그녀의 가슴에 칼을 꽂으며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다.

카르멘의 무대 담배공장 주변에는 상품 유출을 막기 위해 깊게 파둔 해자와 경계초소가 남아 있다. 이 공장은 세비야대학교 캠퍼스로 변했고, 여공들이 재잘거리며 오가던 곳을 지금은 그 또래의 여대생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세비야 구도심에 있는 ‘바르(Bar)’의 내부 전경.  필자 제공
스페인 사람들이 즐겨 찾는 세비야 구도심에 있는 ‘바르(Bar)’의 내부 전경. 필자 제공


‘하루 5끼’ 여유로운 스페인 식사 풍습

대성당 부근 구도심에는 서민들이 즐겨 찾는 ‘바르’가 즐비하다. 영국인의 펍(Pub), 프랑스인의 카페(Cafe) 이용이 일상이라면 스페인 사람에게는 바르(Bar)가 삶 그 자체다. 스페인에는 인구 1000명당 6개의 바르가 있으며, ‘집과 직장 외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곳’이 바르다.

스페인인은 하루에 통상 다섯 끼를 먹는데,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곳 역시 바르다. 아침(Desayuno)은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해결하고, 11시쯤 주스·샌드위치로 ‘아점(Almuerzo)’을 한 다음, 오후 2시경 본격적으로 점심(Comido)을 먹는다. 커피나 빵으로 때우는 것이 아니라, 두 시간에 걸친 전채 요리부터 후식까지 풀코스다. 집이 가까운 사람은 낮잠 시간까지 갖는다. 오후 6시경, 간단한 ‘점저(Merienda)’를 먹고 9시부터 저녁(Cena)을 시작한다. 이런 비효율성을 정책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나, 수백 년 전통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군사박물관이 전하는 참혹했던 스페인 내전

낙천적이고 인정 많은 스페인 민족에게도 85년 전 뼈아픈 내전의 상처가 있다. 스페인광장 군사박물관에는 1930년대 군복·무기·장비가 진열되어 있으며, 내전의 상흔을 이렇게 전한다.

스페인 내전(1936~1939) 무렵 국제적 상황은 민족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사상이 만발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신봉하는 사상에 몸을 바쳤고, 이런 시대적 특징으로 나타난 것이 ‘스페인 내전’이었다. 1936년 2월, 총선거에서 승리한 좌파는 인민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그해 7월 13일, 좌파정부가 우파 정치인 소델로 암살사건에 휘말리자 군부는 스페인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스페인은 인민 정부 지지자(공화주의자)와 군사반란 지지자(국가주의자) 간 긴 내전에 빠져들었다.


프랑코 아프리카군단 본토 상륙…내전 종식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도 군사봉기가 일어났다. 프랑코 장군은 아프리카군단에 본토 이동을 명령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즉, 반란군을 지지하는 국민과 공화파 정부군을 지지하는 또 다른 국민, 다시 말해 ‘두 스페인’이 서로 증오하고 죽이기 시작했다. 내전은 초기부터 유럽과 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독일·이탈리아가 반란군을, 소련·멕시코가 공화파를 지원했다. 영국·프랑스는 중립을 지켰다. 작가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이 참여한 4만여 명의 국제여단 의용군이 공화파에 합류했다. 1939년 3월 28일, 프랑코의 국민군 군대가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하면서 내전은 끝났다. 30만∼60만 명이 죽었으며, 50만 명의 공화파 정부군·민간인이 프랑스로 망명했다. 1841년 이래 스페인에서는 202회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1975년에 사망한 프랑코는 202회째의 성공자였다. 대제국 스페인 역사는 사실상 1936년에 막을 내렸다.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의 전쟁유적지를 배낭여행으로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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