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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 정보의 중요성 간과… 자만의 대가는 컸다

입력 2021. 06. 16   16:02
업데이트 2021. 06. 1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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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메리의 아집이 낳은 비극-마켓 가든 작전
 
1944년 9월 사상 최대 규모 공수작전
연합군, 네덜란드 거쳐 독일 진입 계획
주요 다리 장악 후 기갑부대 진격 구상
불리한 지형·강한 저항에 처참한 실패
진두지휘 몽고메리 부하에게 책임 전가

 

영국 몽고메리 장군.
영국 몽고메리 장군.

버나드 몽고메리(1887~1976)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유명한 영국 장군으로 꼽힌다. 그는 1942년 10월 북아프리카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군을 섬멸했고, 1943년 이탈리아에서도 영국군을 이끌었다. 몽고메리는 1942년 북아프리카에 합류한 미군을 늘 탐탁지 않게 여겼다. 자원이 풍족한 미군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 늘 영국군을 압도하는 전과를 올렸다. 미국의 도움 없이 전쟁에 이길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은 처칠 수상과 몽고메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영국은 전후 미국과 소련이 주도할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영국이 소외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래서 처칠 수상은 영국군이 뚜렷한 전과를 올리기를 갈망했다.

1944년 9월, 연합군은 독일 본토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보급 문제와 독일군의 저항으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때 몽고메리는 획기적인 작전을 구상했다. 네덜란드의 주요 거점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여러 강의 다리를 동시에 점령한 다음 이 길을 이용해 기갑부대를 독일 본토로 빠르게 진격시킨다. 이것이 작전의 핵심이었다. 작전의 명칭은 다리를 점령하는 공수부대의 ‘마켓’ 작전과 이들을 지원하는 기갑부대의 ‘가든’ 작전을 합쳐 ‘마켓 가든(Operation Market Garden)’으로 명명되었다. 마치 1940년에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한 루트를 정반대로 뒤집은 것과 흡사했다. 이 작전이 알려지자 연합군 내부에는 승리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병사들은 크리스마스 전에 고향에 돌아간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독일군 기갑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나라 이름 자체가 ‘낮은 땅’이었다. 따라서 기갑부대가 이동 가능한 제방 위 도로들은 모두 노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다리를 폭파해 버리면 작전이 성공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작전 개시 며칠 전에는 항공 정찰 사진에 독일 전차가 선명하게 찍혔지만 사령부는 이 정보를 무시했다. 사령부는 작전 수정을 요구하는 정보 장교를 강제로 휴가 보냈다.

영화 ‘머나먼 다리’(1977)의 한 장면.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를 충실하게 재현했다.  필자 제공
영화 ‘머나먼 다리’(1977)의 한 장면.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를 충실하게 재현했다. 필자 제공

1944년 9월 17일, 역사상 최대의 공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수천 대의 수송기에서 3만5000명 이상의 공수부대가 낙하하는 장려한 광경이 펼쳐졌다. 미군 101공수사단이 에인트호번, 미군 82공수사단이 네이메헌, 영국군 1공수사단이 아른험을 목표로 강하했다. 최북단에 위치한 아른험은 특히 중요한 곳이었다. 이 지역은 다른 두 지역과 거리가 멀었고, 기갑부대가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마켓’ 작전은 처음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에인트호번에서는 민간인 환영인파가 몰려 작전이 지체되었고, 네이메헌에서는 독일군의 저항이 심해서 다리를 장악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가든’ 작전이 시작되어 영국 30군단 기갑부대가 출발했지만, 제방 위 도로에 노출된 전차들은 독일군 대전차포의 쉬운 표적이 되었다. 작전은 예정 시각을 벗어나 계속 지체되었다.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영국군 1공수사단이 장악했던 아른험 대교의 현재 모습.  필자 제공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영국군 1공수사단이 장악했던 아른험 대교의 현재 모습. 필자 제공

아른험에 강하한 영국 공수부대는 역설적으로 임무를 잘 수행하여 큰 위험에 노출되었다. 프로스트 중령이 지휘하는 공수부대는 아른험 대교와 부근 민가를 장악하고 아군 기갑부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대전차포 사격에 시달리는 기갑부대의 속도는 한없이 더뎠다. 에인트호번과 네이메헌의 미군도 고전을 거듭했다. 시간이 갈수록 최북단의 영국 공수부대는 점차 고립되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보병만으로 독일 기갑부대를 상대해야 했다. 스타니스와프 소사보프스키(1892~1967) 중장이 이끄는 폴란드 1공수여단이 증원되었지만, 이들은 독일군의 공격으로 강하 과정에서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낙하산으로 공수된 보급품도 대부분 독일군이 장악한 지역에 떨어졌다. 30군단 기갑부대가 아른험에서 18㎞ 떨어진 지역까지 진출했지만, 이미 영국 공수부대는 전멸 직전의 상태였다. 영국 공수부대는 부상병들을 남겨둔 채 야간에 후퇴했다. 퇴로가 막힌 채 다리 인근을 방어하던 프로스트 중령의 부대는 전멸했고, 생존자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마켓 가든 작전 실패의 대가는 컸다. 144대의 수송기를 잃었고, 영국 1공수사단은 80%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모두 대체하기 어려운 정예 병력이었다. 아른험 시가전에 휘말린 민간인들의 피해도 컸다.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로 진격로가 막힌 연합군은 네덜란드의 앤트워프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곧바로 스헬데강 전투를 벌여야 했다. 스헬데강 전투로 캐나다군 1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독일군은 아른험 전투 승리로 사기가 되살아났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몽고메리는 작전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에인트호번, 네이메헌, 아른험 등 작전 지역을 대부분 장악했다고 자평했지만, 다리가 빠진 목표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작전 실패의 책임은 몽고메리가 아닌 브라우닝 중장이 뒤집어썼고, 무모한 작전에 반대했던 폴란드군 소사보프스키 중장은 좌천되었다. 종전 후 폴란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소사보프스키 중장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런던에 망명하여 공장 노동자로 살아가다가 1967년 사망했다. 그의 명예 회복은 사후에야 이루어졌다. 1969년, 그의 유해가 폴란드에 안장되었고, 2006년 네덜란드 국왕이 ‘브론즈 라이언’ 훈장을 수여했다.

반면 몽고메리는 승승장구했다. 몽고메리는 영국군 참모총장(1946~1948)에 올랐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연합군 부사령관(1951~1958)을 역임했다. 그는 은퇴 후 회고록과 전쟁연구서를 집필했는데, 여기에도 마켓 가든의 실패는 기록되지 않았다.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는 훗날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의 영화 ‘머나먼 다리’(1977)에서 충실하게 재현되었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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