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전쟁과 인간

시간을 되돌려보지만, 평화와 반전의 목소리는…

입력 2021. 06. 09   17:10
업데이트 2021. 06. 0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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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드레스덴 폭격과 커트 보니것의 소설
 
2차대전 중 독일군 포로 된 미국 작가
드레스덴 참상 SF 형식 소설로 옮겨
시공간 넘나들고 외계인에 납치 설정도
“뭐, 그런 거지” 전쟁 향한 냉소와 유머
사실적 묘사 없이 강렬한 반전 메시지

 

무의미한 폭격 이후 폐허가 된 드레스덴의 풍경.  필자 제공
무의미한 폭격 이후 폐허가 된 드레스덴의 풍경. 필자 제공

1945년 2월 동쪽의 소련군은 베를린 근교인 오데르강까지 진격했고 서쪽의 연합군은 라인강에 이르렀다. 전쟁의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연합군과 소련군 모두 전후의 질서를 재편하는 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고 진격 속도를 높였다. 소련군이 베를린 근처에 도달하자 연합군은 1945년 2월 13일부터 이틀에 걸쳐 독일 동부의 엘베강 인근 도시 드레스덴을 폭격했다. 1000대가 넘는 항공기가 동원된 폭격으로 ‘엘베강의 피렌체’로 불리던 드레스덴은 화염 폭풍에 휩싸여 완전히 파괴되었고, 13만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피해의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드레스덴은 공격할 만한 군사 시설이 없는 도시였기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비난이 빗발치자 연합군은 소련군의 진격을 돕는 작전이라고 발표했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드레스덴은 소련군이 진출한 지역과 아주 가까웠고, 만약 오폭이라도 발생하면 우발적인 충돌로 번질 위험도 있었다. 실제로 항로를 잘못 잡은 폭격기 일부가 체코의 프라하에 폭탄을 투하하는 일도 발생했다. 드레스덴 폭격은 미국과 영국이 스탈린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였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개될 냉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롤란트 수소 리히터 감독의 영화 ‘드레스덴’(2006) 포스터.  필자 제공
롤란트 수소 리히터 감독의 영화 ‘드레스덴’(2006) 포스터. 필자 제공

폐허가 된 드레스덴 외곽에는 미군 전쟁포로수용소가 있었다. 포로수용소는 주요 폭격 목표에서 제외되었지만 살아남은 포로들은 드레스덴을 수습하는 작업에 나서야 했다. 그들 중에는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1922~2007)도 있었다. 코넬대학 재학 중 입대한 보니것은 1944년 12월, 벨기에 북부에서 벌어진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드레스덴 폭격 중 그는 지하 육류저장고로 피신하여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보니것은 폭격에 분노한 독일인들에게 구타당하면서 불에 탄 시체들을 처리하는 일을 했다. 이때 경험한 참상은 그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한 보니것은 제너럴 일렉트릭사에서 근무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의 기억은 글을 쓸 때도 늘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보니것은 1969년에 이르러서야 드레스덴 폭격 경험을 담은 SF 형식의 소설 『제5도살장』(1969)을 발표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시기에 이 소설은 큰 화제가 되었고, 타임지는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로 선정했다.

『제5도살장』(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6)   필자 제공
『제5도살장』(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6) 필자 제공

커트 보니것(1922~2007).  필자 제공
커트 보니것(1922~2007). 필자 제공

『제5도살장』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커트 보니것 자신의 페르소나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빌리는 제대한 후 검안사로 살아가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한다. 탑승한 사람 중 유일하게 생존한 빌리는 자신이 ‘트랄파마도어’라는 행성의 외계인에게 납치되었고, 그들과 지내면서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이후 소설은 빌리의 시간과 공간 여행으로 전개된다. 빌리는 과거나 미래를 오가고 다른 행성으로 가기도 한다. 소설은 빌리의 분열적인 서술로 진행된다. 시공간을 옮겨 제2차 세계대전 시기로 간 빌리는 벨기에 전선에서 동료들과 함께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포로들을 이송하는 기차 안에서 동료 위어리가 숨지자 빌리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빌리와 그의 동료 에드가 더비, 폴 나자로는 드레스덴의 5번 도살장에 배치되어 육류를 가공하는 노역을 하게 된다. 가공육을 훔쳐 먹으면서 버티던 그들은 드레스덴 공습을 겪게 된다. 육류 가공소 지하에 대피하여 살아남은 빌리는 귀국하여 결혼한 뒤 딸을 낳고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빌리는 딸의 결혼식에서 다시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외계인들에게 납치된다. 빌리는 다양한 시공간을 오가면서 ‘지금’은 죽었지만 ‘한때는’ 살아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무수한 삶과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빌리는 “뭐 그런 거지(So it goes)”라는 냉소적인 말을 계속 반복한다. 어쩌면 역사는, 인간들이 아무렇지 않게 서로 죽이는 일을 반복한 시간의 연속일 것이다. 인간들은 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서로를 살해하지만, 조금만 시공간을 초월하여 살펴본다면 그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은 마치 시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닌 것처럼 어리석게 행동한다. 단지 힘을 과시하려고 드레스덴을 잿더미로 만든 사람들은 숱한 죽음들 앞에서도 무감각하지 않은가. 나치와 스탈린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지켜보면서 빌리는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뭐 그런 거지.” 이 대사는 소설 속에 무려 106번이나 등장한다.

전쟁 영화와 소설들은 전장의 참혹함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반전의식을 고취하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을 미화하기도 한다(팝콘을 먹으면서 전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라). 보니것은 『제5도살장』에서 전쟁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소설의 절정은 드레스덴 폭격이 아니라 복구 작업에 투입된 미군 병사가 양철 주전자를 주웠다는 이유로 총살당하는 장면이다. 그것은 불에 탄 시신이 널린 지옥의 풍경을 더욱 암울하게 만든다. 빌리의 시간여행이 지닌 의미는 그가 영화의 폭격 장면을 거꾸로 돌려보는 장면에 담겨 있다. 비행기는 뒤로 날아가고, 포탄은 다시 포신으로 들어간다. 다시 비행기와 포신은 고철이 된다. 총을 든 군인은 소년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시간은 그저 일방적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드레스덴 폭격 6개월 후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그 후로도 인류는 핵실험과 전쟁을 반복했다. 평화와 반전의 목소리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보니것이 유명 작가가 된 이후 드레스덴의 ‘제5도살장’은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드레스덴 폭격은 전쟁을 끝내지도, 독일군을 약화시키지도, 포로들을 구해내지도 못했다. 그 폭격으로 이익을 본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이 말을 들은 기자가 “그 사람이 누구냐?”고 되물었다. 보니것이 대답했다. “바로 나예요. 이 책으로 큰돈을 벌었으니까요.” 이 블랙 유머에는 짙은 비애가 깔려 있다.

그의 소설은 시간을 돌려서라도 비극을 막고 싶은 간절함과 허무주의에 맞선 유머로 가득하다. 『제5도살장』의 첫 문장을 다시 읽는다.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All this happened, more or less).”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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