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사자성어로 읽는 mil story

평화에 길든 조선, 방심의 대가는 컸다

입력 2021. 05. 26   16:54
업데이트 2021. 05. 2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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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거안사위와 가도난

居安思危
살 거, 편안 안, 생각 사, 위태할 위
편안하게 살 때 위험을 생각하다

정나라, 진과 우호관계 맺고 초 견제
약소국임에도 강대국 사이서 생존

열도 통일 도요토미 치밀한 전쟁 준비
통신사 김성일 ‘침략 가능성 없음’ 보고
무방비 상태 전쟁 맞아 속수무책 당해


변박이 1860년 그린 동래부 순절도에는 임진왜란 때 송상현과 군민들이 결사항전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필자 제공(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
변박이 1860년 그린 동래부 순절도에는 임진왜란 때 송상현과 군민들이 결사항전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필자 제공(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

430년 전 이맘때 부산 해안가 이팝나무의 하얀 꽃이 붉게 물들었다. 시간이 흘러 2005년 부산 지하철 공사 중 조선시대 해자터와 무기류가 우연히 발견됐다. 수백에 달하는 인골이 처참한 모습으로 생생하게 돌아왔다. 피에 젖은 창과 깨진 비늘 갑옷들도 있었다. 동래부 순절도를 살펴보러 육군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편안할 때 위험에 대비

기원전 562년 허난성 신정(현재 장저우시)의 약소국 정나라는 고민에 빠졌다. 북으로는 진(晉)나라, 남으로는 초나라가 정나라를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이다. 정나라는 두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생존 전략이 필요했다. 신하 자전은 “이웃 송나라를 괴롭히면 진·초나라가 군사개입을 할 것이다. 이때 진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어 초나라를 견제하자”고 했다. 그의 말 그대로 실현됐다. 정나라는 진나라 도움으로 국가안전을 보장받았다.

정나라 간공은 진나라 도공에게 협력에 감사하는 사례품을 보냈다. 갑옷과 무기 및 악기류 등 귀한 물자였다. 도공은 받은 물품 절반을 외교장관 위강에게 하사하려 했다. 그는 도공을 보좌해 초·정나라 등과 외교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그리고 8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주도한 동맹에서도 절대적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 결과 진나라 중심으로 국제정세는 안정됐다.

위강은 도공의 하사품을 사양하며 “『일주서(逸周書)』에 ‘편안할 때 위험을 생각해야 한다(居安思危·거안사위)’라고 나온다. 위험을 생각하면 대비를 하게 되고(思則有備·사즉유비) 대비하면 걱정거리가 없게 된다(有備無患·유비무환)”고 했다. 좌구명이 지은 『춘추좌전』의 ‘노양공 11년’에 나온다. ‘거안사위’는 ‘유비무환’과 함께 전쟁과 재난 대비 사자성어로 자주 인용된다.

예고된 전쟁을 간과

조선은 ‘거안사위’를 간과했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200년 동안 위태로움을 잊고 풍요에 젖어 있었다. 조선은 부산 앞바다에 왜군이 나타나기 5년 전부터 국가위기경보등이 깜박였다. 첫 번째 주의가 주어졌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반대 세력을 완전히 제압했다. 이제 매서운 눈길이 서쪽으로 향했다. “나는 중국을 정복하는 일 이외에는 남은 일이 없다.” 한반도가 걸림돌이었다.

두 번째 경고등이 켜졌다. 그는 대마도주 소요시시게에게 조선과 교섭해 일본의 명나라 정복 협조를 요청하도록 지시했다. 4년간 교섭은 실패했다.

1590년 심각 단계가 발령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해 지방 우두머리 다이묘들에게 영토를 분배하려 했다. 침략 본질은 그들 세력의 분산에 있었다. 그는 조선 침략 전진기지 나고야성을 세우고 병선을 준비했다. 각 영주 식솔을 가둬놓고 전쟁 준비를 독려했다. 병력을 숨겨둔 영주들은 처벌됐다.

선조는 일본 정세를 엿본 통신사 김성일의 ‘침략 가능성 없음’ 보고만 들었다. 침략을 믿고 싶지 않은 인지 부조화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향도(征明嚮導·명을 치러 가니 길을 안내하라)’ 통보를 받고도 무방비였다. 그의 숨은 속셈도 무시했다. 왜군 선봉 1군 1만8700명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자 비로소 봉화가 올랐다. “태평세월이 200년 이어져 백성은 전쟁을 몰랐고, 군현들은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民不知兵郡縣望風奔潰 ·민부지병군현망풍분궤).” 『선조실록』에 나온다.

길은 절대 빌려줄 수 없다

1592년 음력 4월 14일(양력 5월 24일) 왜군은 부산포에 접근했다. 부산첨사 정발은 절영도에서 사냥 중이었다. 그때도 조공하러 오는 것으로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다. 다음 날 방어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군은 동래읍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왜군은 취병장(聚兵場·현 동래경찰서)에 진을 치고 군사 100여 명을 남문으로 보냈다.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전즉전의 부전즉가아도)”라고 쓰인 목패(木牌)를 세우고 갔다. 항복 요구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미리 침략에 대비했다.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최대한 많이 심어 외부에서 성 내부 관측을 어렵게 했다. 그는 대답했다.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왜군에게 목패를 던지며 결사항전의 뜻을 전했다(동래부 순절도 3번 참조).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문을 집중 공격했다. 성을 방어하던 3000여 명 조선군과 백성 중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포로가 됐다. 일본군은 동래성이 무너지자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북상했다. 100년 이상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전란 속에서 단련된 일본군 철포대 위력은 강했다. 오랫동안 평화에 길든 조선군이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편안할 때 위험에 대비하지 않은 대가는 컸다. 조선 인구는 전쟁 직전에 1100만 명이었으나 전쟁이 끝난 뒤 900만여 명으로 줄었다. 동래부 순절도를 다시 바라보자. 왜군이 동문을 넘어올 때 도망가는 병마절도사 이각, 기와를 던지며 싸우는 부녀자, 목패를 던진 송상현. 우린 어느 그림에 있는가?

오홍국 국제정치학 박사
오홍국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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