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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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함정에는 간부들이 회의하거나 쉴 수 있는 사관실과 원·상사실, 동력을 책임지는 기관실 외에도 다양한 격실이 있습니다. 격실에 놓여있는 수많은 의자 중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의자가 있는데요. 바로 함장 의자입니다. 함장보다 상급자가 함정을 방문하더라도 함장 의자에는 앉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합니다.
함장 의자의 전통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항해시대에도 이 원칙은 지켜졌다고 합니다. 이 전통은 함장이 짊어진 막중한 책임과 관련이 있다는 게 중론입니다. 함정이 출항해 망망대해에 나가면 길게는 1년이 넘는 기간 모든 일은 함장에 의해 집행됩니다. 그만큼 함장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지요. 승조원들은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가진 함장에 대한 예의를 표하고 어떤 VIP 앞에서도 함장의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이런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해군은 거수경례와 더불어 함정의 좁은 공간을 고려해 자연스럽게 정착된 ‘함상경례’도 허용하고 있습니다. 함상경례는 팔꿈치를 45도가량 안쪽으로 굽혀서 하는 경례입니다. 함정 승조원들은 수시로 마주치기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만 거수경례를 하고 이후에는 경례하지 않고 예의만 표시합니다. 하지만 함장이나 타 소속 함정의 상급자에게는 만날 때마다 경례한다고 합니다.
함정의 좁은 통로에서 하는 ‘길차렷’도 해군만의 문화입니다. 비좁은 곳에서 상급자와 하급자가 맞닥뜨렸을 때 상급자와의 거리가 3~4m 정도 되면 하급자는 통로의 한쪽에 등을 붙이고 서서 상급자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터줍니다. 하급자는 길차렷을 통해 상급자에 대한 경례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해군의 경례 중에는 함정 간에 하는 ‘대함경례’도 있습니다. 두 함정이 근접했을 때 험난한 파도와 싸우며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존경과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해상 경례를 하는 것입니다. 두 함정은 경례하는 동시에 발광 신호를 주고받는데, 보통 ‘함장님 수고하십니다’ 또는 ‘안전 항해를 기원합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출항 5분 전 구령이 함정에 울려 퍼지고 2분 뒤 함정에 도착했다면 함정에 오를 수 있을까요? 답은 ‘안 된다’입니다. ‘출항이 3분이나 남았는데…’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요. 해군의 15분 전과 5분 전의 의미를 알면 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함정에서 출항 15분 전은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함정이 출항할 경우 사전에 많은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절차에 따라 출항 준비를 합니다. 가장 먼저 부두와 연결된 각종 공급 케이블을 분리하는데 이때 전기를 공급하는 케이블도 함께 제거합니다. 이후부터는 함정에 탑재된 자체 발전기를 이용해 전기를 공급해야 하지요. 따라서 함정 장비를 구동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발전기를 돌리고 방향을 알려주는 자이로에 시동을 거는 등의 준비를 합니다. 이후 출항 15분 전이 되면 출입항 요원을 배치하고 함정 방송으로 준비가 완료됐음을 승조원들에게 알립니다.
함정에 출항 5분 전 구령이 방송되면 함장은 함교에서 출항을 위한 명령을 하달하고 현문 철거를 지시합니다. 부두와 함정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현문이 철거되면 더 이상 함정에 오를 수 없습니다. 현문 철거 후 부두에 매여 있던 홋줄을 걷고 출항을 알리는 기적을 길게 한 번 울립니다.
15분 전, 5분 전에 의한 출항 절차는 전 세계 해군이 공통으로 적용하는 대표적인 해군 문화입니다. 이 문화는 해군 생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철저하게 이뤄집니다. 각종 과업, 수행을 위한 집합, 당직 교대 등이 15분 전, 5분 전 형식으로 집행됩니다.
바다 신에 무사통과 기원 ‘적도통과제’
용왕 분장…풍자로 스트레스 해소
적도통과제는 항해 중인 배가 적도를 무사히 통과한 것을 기념하면서 시작된 행사입니다. 범선시대 선박들은 오로지 바람에 의지해 항해했기 때문에 적도 부근의 무풍지대를 지날 때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풍지대에 갇히면 식량이나 식수 부족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선원들은 바다의 신에게 무사통과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유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됐다고 합니다. 무풍지대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은 현대의 적도통과제는 지루한 선상 생활을 달래줄 특별한 이벤트나 기념의식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해군의 적도통과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먼저 최선임자나 적도를 통과한 경험이 있는 대원을 용왕으로 선정합니다. 그다음에는 용왕의 비, 궁녀, 도깨비, 신관 등의 보조 역할을 정합니다. 승조원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어울리는 특수 분장을 합니다. 적도를 통과하기 전날 밤 모든 승조원이 비행갑판에 모인 가운데 신관이 용왕에게 받은 메시지를 함장에게 전달하면 행사가 시작됩니다.
용왕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승조원들의 죄를 묻는 재판을 여는데 이때 평소 군기를 담당했거나 대하기 어려웠던 승조원이 재판의 대상이 됩니다. 유쾌하고 익살스럽게 재판하면서 평소 가슴에 담아두고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듭니다. 긴 항해 기간 좁은 함정에서 생활하며 서로에게 가졌던 묵은 감정을 해학과 풍자로 표현하는 뱃사람의 지혜라고 할 수 있지요. 재판 후 용왕이 함장에게 적도 통과 열쇠를 건네면 적도통과제가 종료됩니다. 이 행사를 통해 승조원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서로의 전우애를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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