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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이슬람·포르투갈·스페인이 공존하는 성벽

기사입력 2021. 05. 12   16:16 최종수정 2021. 05. 12   16:20

<18> 스페인 세우타 ②
 
세우타성 8m 성벽에 존재하는 역사
세계에서 유일…난공불락의 성채
능선 전망대 특이 형태 망루 요새
한국 비무장지대 전방초소와 유사

 

아프리카 북단 모로코의 스페인 해외 영토인 세우타 외곽 해안도로 전경. 세우타성은 해안에 높은 옹벽을 만들어 적의 상륙에 대비했다. 필자 제공

아프리카 북단 모로코에 스페인의 해외 영토 세우타(Ceuta)와 멜리야(Melilla) 두 곳이 있다. 세우타는 지브롤터 해협 남쪽에 빠져나온 반도 모양이고, 멜리야는 모로코 북동부에 있다. 스페인 남단 지브롤터(Gibraltar)가 영국령인 것 같이 모로코 내의 두 도시는 스페인령이다. 스페인이 영국에게 지브롤터를 반환하라고 하면, 영국 역시 “당신네도 세우타와 멜리야를 모로코에 돌려주라”고 맞대응한다. 지중해-대서양의 목구멍과 같은 전략요충지를 대가 없이 순순히 돌려줄 국가는 없을 것이다.


괴력의 사나이 헤라클레스가 만든 지브롤터 해협

그리스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는 암살자에게 쫓기다가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아틀라스산맥을 만났다. 그는 산을 넘는 대신 아예 두 손으로 거대한 산줄기를 찢어버렸다. 산맥이 갈라지자 대서양과 지중해 간의 물꼬가 트이면서 마침내 지브롤터 해협이 생겼다. 이때 생긴 ‘헤라클레스의 2개 기둥’이 지브롤터 바위산 ‘타리크’와 세우타의 ‘몬테 아초(Monte Hacho)’ 산이다.

스페인 국가 문장의 헤라클레스 기둥은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신세계를 발견하라”는 의미가 있다. 결국, 스페인은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던 무어족을 몰아내고, ‘대항해 시대’를 열면서 그들의 영역을 세계로 넓혔다. 새로 발견되는 땅들을 모조리 식민지로 만들어 세계제국으로 우뚝 섰다. 세우타 선착장 부근에는 거대한 헤라클레스가 양손으로 두 기둥을 밀어 세우고 있는 동상이 있다. 이처럼 ‘도전, 열정, 창의성’을 의미하는 고대신화를 가진 민족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그 정신이 후손으로 이어지는 모양이다.

세우타성 입구 스페인 포병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동상. 필자 제공

포르투갈의 첫 식민지 개척 전쟁 세우타 기습작전

1415년 7월 25일, 리스본 항구! 200척이 넘는 거대한 선단의 선두에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와 세 아들(두아르테, 페드로, 엔히크)이 섰다. 포르투갈의 운명을 걸고 출전하는 원정군은 2만 명에 달했다. 목표는 세계 교역의 중심지이며 전략 요충지인 북아프리카 세우타. 이 항구는 스페인 남부에 버티고 있는 이슬람 최후 왕국, 그라나다의 생명줄이기도 했다.

8월 21일 아침, 대함대는 세우타를 급습하여 요새에 집중 포격을 가했다.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대포를 배에 실어 이곳까지 날랐다. 요새는 로마·비잔틴·아랍제국을 거치면서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은 무기가 아닌 열정이었다. 누구보다 왕자들이 승리와 영광에 대한 욕심이 컸다. 왕위 계승권자 장남은 최선두에서 상륙작전을 이끌었고, 셋째 왕자 엔히크는 성문이 부서지자 가장 먼저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사기충천한 원정군의 용맹스러운 모습에 이슬람 병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13시간 사투 끝에 결국 세우타는 포르투갈군 수중으로 떨어졌다. 유럽 국가 중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얻은 포르투갈의 첫 해외영토다.

국왕은 세우타를 지켜 포르투갈 땅으로 만들겠노라고 선언했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여 고립된 땅을 지키는 데 들어갈 막대한 자금과 인력 때문이다. 왕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3000명의 결사대를 세우타 성에 남겼다. 그들은 적의 요새 위에 자신들의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적진지 위에 요새를 축성한 세우타 철옹성

포르투갈군은 가느다란 세우타 반도의 허리를 끊어 운하를 낀 성채를 완성했다. 운하 성곽은 아군의 안전한 통항과 융통성 있는 작전을 보장했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되자 세우타도 함께 넘어갔다. 스페인 역시 운하를 더욱 깊게 파고 성채를 높고 두텁게 보강했다. 웅장한 세우타 성은 “로마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격언의 표상이다. 요새 지하를 발굴한 역사학자들은 “8m 안에 비잔틴, 이슬람, 포르투갈, 스페인 성벽이 존재한다. 이런 성채는 세우타 성이 세계에서 유일하다”라고 한다.

방어시설은 세우타 외곽 산악, 해안 곳곳에도 만들어졌다. 산정 높은 곳에 국기가 휘날리는 성채는 현재도 스페인군이 주둔한다. 세우타 해안도로는 10m 이상의 높은 옹벽 위에 있다.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는 적의 상륙이 어렵다. 세우타 성 높이는 20~30m에 달하고, 성곽 내부에는 견고한 지하 엄체호, 수십 개의 화포 진지, 대형 화약통이 산재해 있다. 또한, 성벽 곳곳에 붕대로 머리를 감싼 부상병, 화약을 운반하는 치마 차림의 여성, 지휘도를 뽑아 들고 민관군을 독려하는 지휘관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600년 세우타 성 역사를 고스란히 비각(碑刻)으로 후세에게 보여 준다.


적의 침공을 조기 경보하는 스페인판 GP


세우타 외곽도로를 자동차로 일주하는 데 대략 30~40분 걸린다. 모로코와 국경을 접한 가장 높은 산 능선 전망대에는 특이한 형태의 망루형 요새가 있다. 이 성채는 세우타 주둔 본대에 적의 침공을 조기에 알려주는 전진기지였다. 1800년대 건설한 스페인판 전방초소(GP)다. 규모만 다를 뿐 임무는 한국 비무장지대의 GP와 똑같다. 당시 국경 외곽에 9개소가 있었으나, 현재 7개가 남아 있다. 내부의 나선형 계단은 성채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적 포위망 속에서도 일정 기간 버틸 수 있도록 설계했다. 1층 총안구에서 적과 근접전투 후 불리하면 10m 높이의 2층으로 올라가 저항할 수 있다. 물론 장기체류에 대비한 식량과 식수를 사전에 충분히 비축해 두었다.


모로코·스페인의 세우타 부근 도서영유권 분쟁


모로코가 스페인령 세우타·멜리야를 반환받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국력·군사력·외교력에서 모로코가 너무 열세하다. 최근에는 세우타에서 8㎞ 떨어진 바위섬 ‘페레힐(Perejil)’ 영유권을 두고서도 양국은 수시로 갈등을 빚고 있다. 넓이 1.5㎢(독도의 8배)의 무인도를 현재 스페인이 관할하고 있다. 2002년 7월 11일, 모로코군의 기습적인 페레힐 섬 점령에 스페인군은 즉각 군사적 대응태세를 갖추었다. 미국 중재로 가까스로 무력충돌을 피하면서 쌍방 군대는 철수했다. 스페인은 15세기 이후 실효적 지배 논리를, 모로코는 1956년 독립과 동시에 영유권은 당연히 반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구촌 모든 나라는 예외 없이 인접국과의 영토 갈등을 숙명적으로 겪는 것 같았다.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의 전쟁유적지를 배낭여행으로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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