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주택·관공서·마을회관 등 복구
농기계 수리·방역·이발 지원도 큰 힘
고전 명작 영화 상영 최고 인기
부대원들 매달 1달러 장학금 후원
학업 어려운 학생들에게 희망 전해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장병들은 민사 활동의 하나로 오에쿠시 지역 주민들의 농기계를 수리하고(왼쪽 사진) 주민 의료지원을 진행했다. 국방일보 DB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는 1999년 10월부터 2001년 12월까지는 동티모르 동부지역 라우뗌에서, 이어 2002년 1월부터 2003년 10월까지는 서부 고립지역 오에쿠시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임무 범위와 작전 환경은 시기·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지역과 주민의 평화·안정을 위한 일에는 변함이 없었다.
상록수부대의 주된 임무는 치안 회복·유지였다. 유엔이 부여한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하지만 타국 군처럼 단지 순찰을 강화해 지역을 통제하거나 위협 세력을 경계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민사 작전·활동을 펼쳤다. 치안 회복·유지는 주민들의 안정과 협조에 달린 일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주민들과의 신뢰 형성·구축이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록수부대 5진 단장으로 활동했던 남인우 예비역 대령은 무엇보다 동티모르 주민을 먼저 생각했다.
“치안의 궁극적인 목적은 평화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유엔이나 외부 세력이 아닌 동티모르와 동티모르 주민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티모르의 평화는 상록수부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티모르 주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민사 활동은 이런 관점에서 시작했습니다.”
앞서 상록수부대 1~4진이 동부지역에서 임무 수행하며 민사 활동을 병행해 큰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부대의 작전 지역이 변동됐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 주민을 생각한 활동을 펼친다면 평화의 밑바탕이 될 것이었다. 주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 필요로 하는지 파악했던 이유였다.
“다만 지역적 특징이 다르고 앞선 진들과 시기적으로도 차이가 있어 현지 상황에 맞춘 민사 활동을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물론 주 임무인 지역 순찰·경계와 국경 통제의 임무를 중점에 뒀고요. 주민들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묻고 우리 스스로 무엇을 지원할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파괴된 주택·관공서·마을회관·종교시설 등을 복구하고, 농기계 수리 등을 이어간 일은 주민들의 요청과 상록수부대의 능력이 만난 성과였다. 의료·방역 지원, 태권도·한글 교육, 이발 지원도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됐다. 이발 기구조차 없었던 열악한 상태와 폐허로 인한 위생적 위기 상황을 반영한 활동이었다.
“여러 민사 활동 중에서 주민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분야는 영화 상영이었습니다. 마을을 순회해 여러 지원을 펼치면서 고전·명작 영화를 틀어줬는데,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전까지 그와 같은 경험이 없었던 주민들에게는 낯설고 신기한 문화였던 것 같습니다.”
상록수부대는 지원에만 그치지 않고 주민들과 교감을 이루는 노력에도 힘을 쏟았다. 체육 행사가 대표적이었다. 주민들은 행사에 직접 참여해 부대원들과 함께 땀 흘리며 마음을 주고받았다. 특히 주민들이 축구를 좋아하는 점에 착안해 친선축구대회와 사랑의 축구 교실을 열기도 했다. 주민들이 상록수부대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달러 장학금’으로 이름 붙여진 후원 역시 동티모르 주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학비가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지역 아이들을 보며 상록수부대원들이 자발적으로 후원을 생각해 낸 것. 부대원 개개인이 매달 1달러를 기부하면 이를 한데 모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학생들에게 고루 나눠주자는 취지였다.
“금액의 크기를 떠나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했던 작은 실천이었습니다.”
1달러 장학금은 학생들에게 결코, 작지 않은 도움이었다. 국내에서도 소식을 듣고 일부 모금을 진행해 상록수부대에 전달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금액이 수천 달러에 이르기도 했다. 작은 정성이 모여 큰 희망이 됐다. 덕분에 학생들은 학업을 이어가며 꿈을 계속 키워갈 수 있었다.
“오히려 더욱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고 아쉽습니다. 다만 우리의 진심이 그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마음도 더욱 따뜻해질 수 있었기에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했던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남 예비역 대령은 2002년 4월 임무를 마치고 6진과 업무 인수인계한 뒤 부대원들과 함께 귀국 길에 올랐다. 제 역할을 오롯이 다하고 동티모르를 떠날 수 있어 감격스러웠다. 주어진 범위 내에서 소신껏 최선을 다한 일이었다. 군 생활을 돌이켜보면 가장 보람된 시간이었다. 그는 당시 귀국 비행기에서 부대원들에게 전했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너희들이 특전 요원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유엔을 대표해 동티모르에서 헌신했던 일들은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동티모르는 우리의 노력을 기억할 것이다. 너희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서현우 기자
파괴된 주택·관공서·마을회관 등 복구
농기계 수리·방역·이발 지원도 큰 힘
고전 명작 영화 상영 최고 인기
부대원들 매달 1달러 장학금 후원
학업 어려운 학생들에게 희망 전해
동티모르 상록수부대 장병들은 민사 활동의 하나로 오에쿠시 지역 주민들의 농기계를 수리하고(왼쪽 사진) 주민 의료지원을 진행했다. 국방일보 DB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는 1999년 10월부터 2001년 12월까지는 동티모르 동부지역 라우뗌에서, 이어 2002년 1월부터 2003년 10월까지는 서부 고립지역 오에쿠시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임무 범위와 작전 환경은 시기·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지역과 주민의 평화·안정을 위한 일에는 변함이 없었다.
상록수부대의 주된 임무는 치안 회복·유지였다. 유엔이 부여한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하지만 타국 군처럼 단지 순찰을 강화해 지역을 통제하거나 위협 세력을 경계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민사 작전·활동을 펼쳤다. 치안 회복·유지는 주민들의 안정과 협조에 달린 일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주민들과의 신뢰 형성·구축이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록수부대 5진 단장으로 활동했던 남인우 예비역 대령은 무엇보다 동티모르 주민을 먼저 생각했다.
“치안의 궁극적인 목적은 평화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유엔이나 외부 세력이 아닌 동티모르와 동티모르 주민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티모르의 평화는 상록수부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티모르 주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민사 활동은 이런 관점에서 시작했습니다.”
앞서 상록수부대 1~4진이 동부지역에서 임무 수행하며 민사 활동을 병행해 큰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부대의 작전 지역이 변동됐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 주민을 생각한 활동을 펼친다면 평화의 밑바탕이 될 것이었다. 주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 필요로 하는지 파악했던 이유였다.
“다만 지역적 특징이 다르고 앞선 진들과 시기적으로도 차이가 있어 현지 상황에 맞춘 민사 활동을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물론 주 임무인 지역 순찰·경계와 국경 통제의 임무를 중점에 뒀고요. 주민들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묻고 우리 스스로 무엇을 지원할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파괴된 주택·관공서·마을회관·종교시설 등을 복구하고, 농기계 수리 등을 이어간 일은 주민들의 요청과 상록수부대의 능력이 만난 성과였다. 의료·방역 지원, 태권도·한글 교육, 이발 지원도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됐다. 이발 기구조차 없었던 열악한 상태와 폐허로 인한 위생적 위기 상황을 반영한 활동이었다.
“여러 민사 활동 중에서 주민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분야는 영화 상영이었습니다. 마을을 순회해 여러 지원을 펼치면서 고전·명작 영화를 틀어줬는데,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전까지 그와 같은 경험이 없었던 주민들에게는 낯설고 신기한 문화였던 것 같습니다.”
상록수부대는 지원에만 그치지 않고 주민들과 교감을 이루는 노력에도 힘을 쏟았다. 체육 행사가 대표적이었다. 주민들은 행사에 직접 참여해 부대원들과 함께 땀 흘리며 마음을 주고받았다. 특히 주민들이 축구를 좋아하는 점에 착안해 친선축구대회와 사랑의 축구 교실을 열기도 했다. 주민들이 상록수부대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달러 장학금’으로 이름 붙여진 후원 역시 동티모르 주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학비가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지역 아이들을 보며 상록수부대원들이 자발적으로 후원을 생각해 낸 것. 부대원 개개인이 매달 1달러를 기부하면 이를 한데 모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학생들에게 고루 나눠주자는 취지였다.
“금액의 크기를 떠나 아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했던 작은 실천이었습니다.”
1달러 장학금은 학생들에게 결코, 작지 않은 도움이었다. 국내에서도 소식을 듣고 일부 모금을 진행해 상록수부대에 전달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금액이 수천 달러에 이르기도 했다. 작은 정성이 모여 큰 희망이 됐다. 덕분에 학생들은 학업을 이어가며 꿈을 계속 키워갈 수 있었다.
“오히려 더욱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고 아쉽습니다. 다만 우리의 진심이 그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마음도 더욱 따뜻해질 수 있었기에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했던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남 예비역 대령은 2002년 4월 임무를 마치고 6진과 업무 인수인계한 뒤 부대원들과 함께 귀국 길에 올랐다. 제 역할을 오롯이 다하고 동티모르를 떠날 수 있어 감격스러웠다. 주어진 범위 내에서 소신껏 최선을 다한 일이었다. 군 생활을 돌이켜보면 가장 보람된 시간이었다. 그는 당시 귀국 비행기에서 부대원들에게 전했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너희들이 특전 요원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유엔을 대표해 동티모르에서 헌신했던 일들은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동티모르는 우리의 노력을 기억할 것이다. 너희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서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