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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주 언양읍성(彦陽邑城)
정사각형에 가까운 희귀한 모양 가치 높아
삼국시대 토성...조선 시대에 석성으로 쌓고
임진왜란 때 무너져 광해군 때 새로 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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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성에서 석성으로… 현재까지 총 3번의 복원
언양읍성은 삼국시대부터 있었고 당시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이런 토성을 조선 시대에 석성으로 쌓았는데 이때가 1500년(연산군 6)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무너졌고 1617년(광해군 9)에 새로 쌓았다. 성의 둘레는 약 1,500m로 높이는 약 6.3m에 달한다. 남문이 깨끗하게 복원되기 이전의 무너진 성벽에서 가장 높은 곳은 4.85m였다.
현재 4개의 문지에서 복원된 문은 ‘영화루’인 남문뿐이다. 복원된 남문은 문의 누각을 비롯해 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옹성과 양옆의 성벽, 그리고 성곽 위의 여장까지도 옛 모습을 되찾았다.
여장에는 원총안과 근총안이라는 구멍도 제대로 복원했는데, 원총안은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는 사각형의 구멍이고 근총안은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하기 쉽도록 아래쪽이 경사진 구멍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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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문인 ‘영화루’ 가장 먼저 복원, 성벽에 의지 않고 서 있는 ‘개거식’
남문 앞쪽으로는 성 주위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도랑인 ‘해자’를 볼 수 있다. 돌로 해자의 너비만큼 일정하게 덮어 주변과 구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발굴 조사를 마친 뒤 다시 흙으로 덮었지만, 사람들에게 당시의 해자 위치와 규모를 알려주기 위해서다.
당시 이 해자의 너비는 3~5m 정도였고 바닥에는 침투한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목익’이라는 날카로운 말뚝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해자에 대한 안내문에 따르면 “해자는 전체에 걸쳐 성벽으로부터 9~9.6m 떨어진 곳에 조성되어 있었고 깊이는 90㎝로 확인된다”며 “해자의 양쪽 가장자리에는 흙이 무너지지 않게 굵은 강돌을 한 줄로 쌓았다”고 알려준다.
또한 남문에 대한 안내문에는 “언양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1800년대 초반 ‘진남루’에서 ‘영화루’로 이름이 바뀐 것을 알 수 있고 1900년 전후에 최종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두 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영화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구조이며 성벽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서 있는 개거식(開据式)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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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 위해 각종 건물들 비워진 상태… 2025년 단기 복원계획
언양읍성을 따라 돌다 보면 성벽 모서리마다 보초병이 망을 보던 각루(角樓)를 볼 수 있고 각각의 문지 양쪽에 4각형으로 돌출된 치성이 눈에 들어온다.
성 안에는 객사와 동헌 등 각종 관아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논·밭과 함께 언양초등학교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언양초등학교(2015년 이전)를 비롯해 주변이나 내부의 각종 건물들은 이미 언양읍성 복원을 위해 모두 비워진 상태이며 올해 4월 언양읍성 안내소가 개소해 복원을 위한 울주군의 의지가 뜨거운 상태이다.
이 밖에도 언양읍성에는 동문과 서문을 잇는 수로(水路)와 함께 동서남북을 관통하는 도로, 그리고 우물이 4개 있었다고 알려졌다.
현재 언양읍성의 복원사업은 단기와 중기, 장기 사업계획으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고 복원 구간 또한 성벽 관련 지역과 성내 시설, 성내외 공간 등 3개의 구역으로 분리했는데 2025년까지 이미 단기 복원계획을 진행 중이다.
한편 모든 정비사업을 마친 뒤에는 읍성 내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한 편의 공간과 경작체험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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