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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반월성, 삼국시대 치열했던 격전장

입력 2021. 04. 07   10:17
업데이트 2021. 04. 0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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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포천시 반월성(半月城)


성의 형태가 반달과 비슷해 ‘반월성’으로 불리고 있다. 한강 지역 점령하기 위한 고구려와 신라의 전투지로 삼국시대 이후 몇 백 년간 방치, 성곽 절반만 남아있다.


반월성에서 가장 큰 동문. 현문식 성문으로 성 밖에서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야 한다.
반월성에서 가장 큰 동문. 현문식 성문으로 성 밖에서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야 한다.


■ 삼국시대의 산성


경기도 포천시 청성산(해발고도 283m) 정상에 위치한 반월성은 가벼운 산행으로, 혹은 차량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포천 지역은 물론 인근에서 가장 큰규모의 성 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버려진 성이라는 것을 말해주듯 성곽의 절반 정도가 아직도 복원되지 못한 상태다. 복원된 성곽 또한 너무도 깨끗한 부분이 많아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그렇게나마 옛 성곽의 모습을 지금이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삼국시대 치열한 격전장이었던 반월성. 조선시대 잠깐 개축했지만 이후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폐성이 된 반월성의 모습은 아직도 쓸쓸함을 자아낸다.


옛 성벽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북쪽 성벽.
옛 성벽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북쪽 성벽.
반월성 제사시설인 애기당지. 지역 수호신을 모신 사당으로 건물은 소실됐다. 애기당은 현재 2단의 기단만 복원한 상태다.
반월성 제사시설인 애기당지. 지역 수호신을 모신 사당으로 건물은 소실됐다. 애기당은 현재 2단의 기단만 복원한 상태다.


■ 치열한 접전지였던 반월성


반월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삼국시대 때 백제가 한강 지역을 점령한 뒤 북진하던 시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지역을 점령하며 반월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접경 지역의 성이었던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짐작된다.

특히 신라는 629년 고구려로부터 반월성을 빼앗아 한강 이북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영토 확장의 토대로 성을 활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 이후 반월성은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면서 폐성하기에 이르렀다. 몇 백 년 동안 방치됐던 반월성은 조선 시대에 잠시 개축됐지만 5년간의 사용을 끝으로 완전히 성(城)으로서의 역할을 내려놓게 된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 남벽 길에서 동쪽에 자리한 동치성. 옛 돌과, 복원하며 사용한 돌이 어우러져 바둑판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치성 앞에 성벽을 보강하기 위한 보축성벽이 보인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 남벽 길에서 동쪽에 자리한 동치성. 옛 돌과, 복원하며 사용한 돌이 어우러져 바둑판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치성 앞에 성벽을 보강하기 위한 보축성벽이 보인다.


■ 성의 모양은 ‘반달모양’


반월성을 소개하는 동문 앞 안내문에 따르면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조선 시대 문헌에 1618년(광해군10)에판관이성구가개축하여1623년까지 사용했으며 둘레가 1930척이고 성 안에는 두세 곳의 우물 및 장령, 삼대, 기우제단, 성황사등이있었다 고밝히고있다.

성의 형태는 마치 반달 과 비슷한 모양이어서 반월성 혹은 반월산성으로 불리고 있으며 둘레는 1080m인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 산성에는 발굴조사를 통해 동치성과 서치성, 동 남북문지 그리고 건물지, 2개의 우물지, 장대지, 제사시설인 애기당지 등이 발견됐다. 성벽은 길게 남쪽으로 이어진 남벽만 복원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다.

그 옛날 군사적 요충지로서 한강 지역과 포천을 수호하는 역할을 해왔던 고성(古城) 반월성. 비록 옛 명성은 잊혀 졌지만 체계적인 발굴조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만큼 많은 사람들의 애정 어린 방문이 이어질것으로 기대된다.


포천반월성 지도사진
포천반월성 지도사진
■ 편집 = 이경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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