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서산 ‘해미읍성(海美邑城)’
성곽순례를 하며 앞서 소개했던 낙안읍성, 고창읍성에 이어 ‘조선 시대 3대 읍성’ 중 하나인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을 찾았다. 약간의 언덕 위에 축성된 고창읍성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함을 자랑한다면 해미읍성은 평지 위에 축성돼 잘 정돈되고 깔끔한 석성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성벽도 높은 편이어서 성을 둘러싼 해자(垓子)와 함께 전투에 최적화된 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성 내부에는 공성전 무기인 ‘투석기’, 성벽을 타고 오를 수 있는 사다리가 설치된 ‘운제’와 함께 수레에 검을 꽂아 만든 ‘검차’, 지금으로 치면 다련장 로켓인 ‘신기전기화차’, ‘천자총통’, ‘화포’, ‘별대완구’등 전쟁과 관련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어 관람객들에게 볼거리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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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안 방어의 중추기지로 사용된 곳
해미읍성은 고려 말 왜구들이 많은 피해를 주자 조선 초기인 1417년(태종 17)부터 1421년(세종 3)까지 4년여에 걸쳐 축성, 서해안 방어를 맡았다.
당시 충정도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이 해미로 옮겨오면서 축성된 해미읍성은 더욱 확대돼 1491년(성종 22)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됐다.
충청병마절도사영은 충청도군을 지휘하던 육군 최고지휘관이 있던 곳으로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성안에 있던 해미가 서해안의 군사적 거점으로서 얼마나 중요했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은 1652년(효종 3)까지 약 230년간 계속됐다. 이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주하자 해미 현감이 이 성에 옮겨와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군사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1579년(선조 12) 충청병영 군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했다.
■ 동문과 암문 사이 해자(垓子) 복원
북쪽의 낮은 산과 평지를 이용해 쌓은 평산성(平山城)인 해미읍성은 축조 방식이 독특하다. 하단에는 주로 큰 돌을 이용했으며 위로 갈수록 작은 돌들이 층층이 쌓여 축조됐다. 성곽 안쪽은 흙으로 채워 무너짐을 방지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높고 튼튼하게 쌓을 수 있는 방법으로 보여 진다. 성곽의 둘레는 1,800m. 남북으로 긴 형태이고, 높이는 5m로 높은 편이다.
해미읍성에는 동·서·남문과 북문인 암문 등 4개의 문이 있으며 남문과 서문 사이에 2개의 치성이 있다.
현재 주 출입문은 남문인 진남문(鎭南門)이며 매일 개방하고 있다. 서문은 주말 직거래 장터가 열리면 개방하고 동문은 일요일에 개방한다고 한다. 북문은 암문으로 문 위에 누각이 없다. 항상 닫혀있는 문이고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기가 어렵다.
■ 가슴 아픈 역사가 전해지는 해미읍성
성내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東軒)을 비롯한 관아와 객사 등의 건물이 복원돼 있다. 성내에서 가장 높은 능선에는 ‘청허정’이라는 누정(樓亭)이 있는데 이곳에서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무예를 익히기도 했으며 문객들이 시를 짓기도 했다.
성 주변에는 읍성 전체를 둘러싼 해자(垓子)가 있었는데 지금은 동문과 북문인 암문 사이가 복원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적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탱자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성벽의 돌들을 자세히 보면 희미하게 청주, 서천, 부여, 공주 등 고을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축성 당시 구간 구간을 고을별로 나눠 쌓게 함으로써 성벽의 무너짐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지도록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해미읍성은 1866년 천주교도들을 탄압한 ‘병인박해’ 당시 1,000여 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잡혀 와 고문을 받고 처형당한 순교 성지이기도 하다. 수령이 300년 넘은 회화나무 뒤에 옥사가 있는데 이곳에 수감된 천주교도들을 끌고 나와 이 나뭇가지에 철삿줄로 신자들의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한 가슴 아픈 역사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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