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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분단 상징서 평화·통일 상징으로… 그날, 어서 오라

기사입력 2020. 12. 24   17:09 최종수정 2020. 12. 27   14:24

76·끝-한국의 비무장지대(DMZ)

 
군사분계선 중심 남북 2㎞씩 완충지대
北 정전협정 위반 반복에 무장지대 변모

희귀 동식물 140여 종 등 자연생태보고 

 

육군25사단 상승대대 GOP 장병들이 눈쌓인 남방한계선 철책을 따라 이동하며 철책 정밀점검을 하고 있다.  조용학 기자

남한과 북한을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Demilitarized Zone)는 한반도 휴전과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를 상징한다. 이곳은 6·25전쟁(1950~1953)을 정지시키고자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 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씩 총 4㎞의 폭을 둬 상호 일정 간격을 유지한 완충지대로 규모는 약 3억 평에 달한다. 군사분계선은 첫 번째 표지판(제0001호)이 세워진 임진강 하구 파주 창동리 인근에서 시작해 고성군 간성면 송도진리 인근까지 이른다. 표지판이 연결된 총 길이, 즉 군사분계선의 실제 거리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통상 155마일로 통용된다.

비무장지대는 한반도를 비롯해 남극, 쿠웨이트-이라크 국경 장벽, 이집트-이스라엘 국경 지대 등에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군사적인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군대 주둔, 무기 배치, 군사시설 설치가 금지된다. 하지만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에는 남한과 북한이 설치한 GP(Guard Post·최전방 경계초소)가 있고 인접 지역에 남북한 군사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어 ‘비무장지대’라는 이름과는 달리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한 지역이다.


강대국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할


오천년 역사를 이어오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번성한 한민족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강제 병합되며 식민지가 됐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 전쟁(1941~1945)에 패망하며 한민족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길지 않았다.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북위 38선을 경계로 해서 남한은 미국, 북한은 소련이 분할, 진주하면서 군정(전쟁 중 또는 전쟁 후에 점령지에서 군대가 행하는 임시 행정)을 실시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의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는 한반도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해 협의했다. 이로 인해 신탁통치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돼 혼란에 빠졌던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민족 간에 총부리 겨눈 동족상잔의 비극


한반도 안에 체제가 다른 2개의 정부가 세워진 것은 결국 비극의 씨앗이 된다. 38선 부근에서 종종 크고 작은 군사 충돌이 있었지만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38도 이남으로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함으로써 6·25전쟁이 발발한다. 북한은 남한을 해방해 통일을 성취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같은 겨레끼리 서로 싸우고 죽인 비극이다. 미국과 중국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국제전으로 확대됐다. 3년 1개월간의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 국토가 폐허로 전락했다. 남한과 북한을 합쳐 사망자는 100만 명이 넘었는데 그중 85%가 민간인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하며 후퇴를 거듭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1880~1964) 장군이 이끄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반격에 나선 한국군은 그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1951년 6월 16일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던 트리그브 리(Trygve Halvdan Lie)의 ‘휴전 제의 연설’에 이어 며칠 뒤인 6월 23일에는 유엔 소련대사인 말리크(Yakov Alexandrovich Malik)가 유엔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교전국들이 휴전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양측의 입장 차에 따라 정전회담은 2년여 동안 결렬과 재개가 반복됐다. 이 기간에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는데,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이 벌어졌다.


정전협정 체결로 비무장지대 설정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대표와 북한·중국 대표 간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남과 북 사이에 군사분계선이 확정되고 이에 따라 비무장지대가 설정됐다. 당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정전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임진강에서 동해안까지 총 1292개의 군사분계선 표지판이 세워졌다. 1954년부터 군사분계선 일대의 군 작전 및 군사시설 보호와 보안 유지를 위해 남방한계선으로부터 5~20㎞ 정도가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으로 설정됐다.

휴전협정 초기에는 비무장지대 내에 군사력이 배치되지 않았으나, 북한군이 1959년부터 1966년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군사력 증강과 초소의 요새화를 함으로써 비무장지대는 점차 중무장 지역으로 변모했다.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판문점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하는 반경 400m의 원형 지역으로 유엔군과 북한군 모두가 경비하는 공동경비구역(JSA)이다. 양측의 경비병들은 군사분계선을 자유로이 드나들었으나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의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 금지되고 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된 후부터 1987년 7월까지 34년간 북한은 14만 8044건의 정전 협정을 위반 한 것으로 기록됐다.

전쟁으로 한 민족이 총부리를 겨누던 비무장지대는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세월 동안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긴 금단의 땅이 되면서 희귀 동식물 140여 종을 포함해 2800여 종의 동식물이 자라는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불린다. 남과 북이 통일에 한 걸음 다가가서 우리 생애에 한국의 비무장지대가 분단의 상징이 아닌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거듭나는 날이 오길 바란다.


필자 이상미 입니다. 1년 6개월간의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기획 칼럼을 마감합니다. 평소 ‘전쟁’에 대해 접하거나 생각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매주 칼럼을 쓸 때마다 매번 전쟁을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더불어 건축물로 전쟁을 풀어내야 했기에, 전쟁사가 있는 건축물을 찾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건축물에 대한 온 마음을 담아 글을 쓰고자 했습니다. 매번 새벽이 돼서야 마감이 끝났습니다. 월요일마다 발행되는 지면을 기다리고 읽어주는 독자 여러분이 있기에 고된 원고 마감을 계속 이어올 수 있지 않았나 합니다. 이 칼럼은 내년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지면의 한계로 못다한 이야기로 더 풍성하게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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