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日 제국주의 야욕의 잔상…반핵·평화 상징으로 남아

입력 2020. 12. 20   13:32
업데이트 2020. 12. 2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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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일본의 원폭 돔 

바로크 양식 철골 돔 형태 3층 건물
산업 발전 성과 알리기 위해 건축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도시 70% 사라지고 14만명 목숨잃어
산업장려관도 2층 이상 내벽 붕괴돼
현재 평화 기념 공원 일부로 자리매김
원폭 돔 전경. 사진=jw-webmagazine.com
원폭 돔 전경. 사진=jw-webmagazine.com

원폭 돔 내부 전경.  사진=zekkeijapan.com
원폭 돔 내부 전경. 사진=zekkeijapan.com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떨어진 이후의 히로시마 시내 모습. 뒤로 보이는 건물이 원폭 돔이다.  사진=www.stripes.com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떨어진 이후의 히로시마 시내 모습. 뒤로 보이는 건물이 원폭 돔이다. 사진=www.stripes.com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원폭 돔은 인류 최초로 원자 폭탄의 피해를 받은 참상을 증언하는 건축물이다. 이곳은 1915년 히로시마 발전을 상징하는 상업 전시관으로 세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침공하면서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전쟁 말에 미국은 포츠담 선언에 불복하던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했다. 1945년 8월 6일 미 공군의 B-29 폭격기가 원자 폭탄을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다. 이 폭탄으로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도시의 70% 이상이 폭파됐다. 원폭 돔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을 때 지붕과 내부가 파괴됐지만 모두 폭파되지는 않았다. 일본의 원폭 돔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915년 상업 전시관으로 지어져

일본은 19세기 후반에 메이지유신 후 막부 정치를 끝내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제도를 확립해 근대 국가로 빠르게 진입했다. 대륙으로 진출한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 러일전쟁(1904∼1905)에서 잇달아 승리함으로써 급격히 자본주의 국가로서 발전을 이뤄 제국주의 정책을 심화하고 주변국을 침략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 침탈 뒤 합병당하던 1910년 일본은 히로시마에서 산업 발전의 성과를 알리기 위해 상업 전시관을 건축하기로 했다. 체코의 건축가 얀 레첼(1880~1925)의 설계로 1914년 공사가 시작돼 1915년 4월 벽돌로 지은 3층 건물의 중앙에 2층 높이의 철골 돔으로 총 높이 25m에 달하는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완공됐다. 이곳은 그해 8월부터 히로시마현 물산진열관으로 개관해, 1921년 히로시마현 상품진열소로 이름이 바뀌었고, 1933년 히로시마현 산업장려관으로 개칭됐다.


일본, 진주만 습격 태평양 전쟁 일어나

1930년대가 되자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은 점점 더 커졌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웠으며,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난징대학살을 벌였다. 중국 침략을 시작으로 필리핀과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등을 점령한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습격해 태평양 전쟁(1941~1945)을 일으켰다. 하와이는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진 기지가 있는 곳으로 일본의 단 한 번 공격으로 정박해 있던 8척의 전투함과 180대가 넘는 비행기가 완전히 파괴되는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

진주만 폭격 후 일본은 무서운 기세로 동남아 일대와 태평양의 주요 섬들을 점령했지만,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으로 태평양 전쟁은 전환점을 맞았다. 미군은 이 전투에 항공모함 3척, 전투함 35척, 비행기 233대를 동원했다. 일본군은 항공모함 4척, 전투함 43척, 비행기 285대를 동원하면서 전력 면에서 앞섰지만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입수하면서 크게 승리했고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원자폭탄 투하에 일본 무조건 항복 선언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됐다. 그해 7월 26일 미국은 영국, 중국과 함께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에 무조건 항복하라고 요구했으나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일본의 인구 밀집 지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된다. 히로시마는 대규모 산업도시이자 일본군 제2사령부이면서 통신 센터이자 병참 기지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했기에 투하 장소로 결정됐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미 공군의 B-29 폭격기 3대 중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이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이름 지은 ‘에놀라 게이’에서 길이 3m, 지름 71㎝, 중량 약 4톤에 이르는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고도 9470m 상공에서 떨어져 히로시마 580m 상공에서 폭발했다. 당시 히로시마의 인구는 34만 명이 넘었는데, 원자폭탄이 투하되자마자 이 중 7만 명이 바로 사망했고, 부상한 7만 명도 목숨을 잃었다.

도시를 구성하고 있던 건물 9만여 채 가운데 약 6만5000채가 파괴됐다. 산업장려관도 지붕과 마루, 2층 이상의 내벽 대부분이 붕괴하는 피해를 보았지만, 수직으로 충격을 받은 탓에 건물의 석재와 철골 구조는 남게 됐다. 일본의 저항이 계속되자 미국은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왕 히로히토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전쟁은 종결됐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1949년 8월 6일 공표된 히로시마 평화 기념 도시 건설법에 따라 히로시마에 평화 기념관, 공원, 희생자를 위한 기념탑을 공모해 단게 겐조(1913~2005)의 설계로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이 1955년 개관했다.

1966년 히로시마 시의회가 산업장려관을 원폭 돔으로 명명해 영구 보존을 결의하면서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의 일부가 됐다. 공원에는 평화의 종, 기념 동산, 원폭 어린이 동상, 일본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평화 기념 자료관,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1996년 유네스코는 “인간의 실수와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원폭 돔은 핵무기를 폐기하고 영원한 인류 평화를 추구한다는 서약의 상징”이라며 원폭 돔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매년 8월 6일이면 희생자 추모제가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에서 열린다. 원폭 돔은 핵폭탄의 피해를 그대로 증언하며 핵무기와 전쟁이 사라진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꿈꾸고 있다. <이상미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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