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충주 철광산 빼앗기자
재정 등 약해지며 풍전등화
신라 조공외교로 위기 모면
법흥왕 이사부 금관가야 공격
왕자와 투항하고 진골에 편입
가야는 전기가야(42~532·491년)와 후기가야(5세기 중반~562·약 100년)로 구분한다. 한반도 동남방(경상남도)에 존속했던 소국가 연맹체로 개국 초에는 20여 개 나라가 난립해 국명(가야·구야·가락·가라·가량 등)도 다양했다. 일찍이 낙동강(김해)·섬진강(하동) 유역의 무역항을 개방해 국제 중개 무역으로 국가 경제를 지탱했다. 우수한 철기 문화로 신라·백제·고구려와 대등한 4국 체제를 형성했으나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 통일에 실패해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금관가야(경남 김해) 10대 구형왕(재위 521~532)은 사양길에 접어든 국가 운명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13개국으로 유지되던 가야연맹은 신라(동쪽·낙동강)와 백제(서쪽·섬진강)의 수시 침공으로 국경이 자주 변했고 외침에 대한 연맹국 간 공동 대응도 요원한 실정이었다. 김수로왕 건국(AD 42) 이후 유지돼 오던 종주국 지위도 대가야(경북 고령)가 자처하고 나선 지 오래였다. 금관가야에 조공하던 소(小)가야국들도 대가야에 공물을 진상하며 각자도생의 생존 전략을 추구했다.
5세기 들어 가야는 울산 철광산을 신라에 빼앗겼다. 연이어 충주 철광산까지 백제에 점령당하며 가야의 주력 산업이던 철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다. 가야는 양질의 철 생산을 통한 탁월한 무기 제조 기술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과도 동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해 왔다. 덩이쇠를 중원 제국과 왜에도 수출해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충당했다. 신라는 가야의 월등한 금속 제련 기술을 존중해 금관(金官)가야로 호칭했다.
풍전등화의 국가 위기 앞에 전전긍긍하기는 대가야 이뇌왕(10대·재위 494~6세기 중반)도 매일반이었다. 대가야는 섬진강 포구 다사(경남 하동)항을 통한 교역으로 부족한 생필품을 보충하고 있었다. 가야연맹의 관문 도시로 전략적 요충지를 겸했던 다사 항구를 백제가 점령(520)해 대가야의 필수품 조달이 봉쇄됐다.
다급해진 이뇌왕이 신라 법흥왕(23대 재위·514~540)한테 사신을 급파해 결혼 동맹(522)을 청원했다. 신라도 가야 영토 내 백제 세력 확충을 원치 않았다. 법흥왕은 이찬(17관등 중 2등급) 비조부 누이를 대가야에 보내며 종자(從者·시중드는 사람) 100여 명을 수행시켰다. 이뇌왕은 비조부 누이를 왕비로 맞아 월광(11대 도설지왕) 태자를 출산했다. 종자들은 체격이 우람하고 안광이 형형한 장정들이었다. 이뇌왕은 이들이 섬뜩했다.
구형왕 3년(523) 백제에서는 25대 무령왕이 훙어(薨御)하고 26대 성왕(재위 523~554)이 즉위했다. 성왕은 백제 제국 부흥을 실현코자 변방 3국(신라·고구려·가야)을 무차별 침공했다. 구형왕이 이뇌왕에게 연합 전선 구축을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구형왕은 백제와 오랜 우호 관계를 끊고 신라에 조공하며 백제를 경원시했다.
구형왕은 신라와의 조공 외교를 통해 당면 위기는 모면했지만 진즉부터 법흥왕의 야심을 간파하고 있었다. 법흥왕은 가야의 경계심을 이완시켜 국력이 약화하면 신라 영토로 병합하려는 야심만만한 정복 군주였다. 구형왕은 초조해졌다. 구형왕 4년(524) 9월 법흥왕이 남쪽 변방을 순시한다는 정보가 구형왕에게 입수됐다. 구형왕은 굴욕을 감수하며 근위병 10명과 측근 대신 수 명만 대동하고 법흥왕을 찾아갔다.
구형왕은 법흥왕에게 금관가야 국권을 이양할 테니 왕실 가족 안위와 예우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법흥왕은 쾌히 응했다. 뒤늦게 안 가야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이 격분했다. 누란 위기의 국가 운명보다 왕족 생존이 우선이냐며 금관가야 도처마다 민중이 봉기했다. 실덕한 왕의 권위는 회복 불능이었고 이후 구형왕은 시해 위협의 공포 속에 식물 왕으로 소일했다.
비조부 누이 수행 종자들에게서 위협을 느낀 대가야 이뇌왕은 가야연맹 각국으로 이들을 분산시켜 집단 세력화를 사전 차단하려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종자들은 가야연맹 각국 조정에 더 높은 지위와 예우를 강요하며 왕까지 능멸했다. 가야 예복을 거절하고 신라 조복을 착용했다. 이뇌왕이 법흥왕에게 기만당했음을 자각한 건 구형왕이 법흥왕과 망국 후 보전책을 흥정하고 있을 시기였다. 종자 모두 법흥왕이 밀파시킨 간자임을 감지했을 때는 가야연맹의 내밀한 정보가 신라 조정으로 이첩된 후였다.
가야연맹 중 탁순국(경남 창원) 왕이 맨 먼저 격노했다. 종자들의 관직을 박탈하고 본국으로 강제 축출하였다. 곧바로 △가라국(경북 고령) △안라국(경남 함안) △사이기국(경남 의령군 부림면) △다라국(경남 합천군 합천읍) △졸마국(경남 함양) △고차국(경남 고성) △자타국(경남 진주) △산반하국(경남 합천군 초계면) △걸손국(경남 산청) △임례국(경남 의령군 의령읍) △탁순국(경남 창원) △탁기탄국(경남 창녕군 영산면·경남 밀양) △남가라국(경남 김해)의 13국 중 남가라국(금관가야) 구형왕만 제외하고 간자들을 추방했다. 이뇌왕 신뢰는 추락했고 가까스로 유지되던 후기 가야연맹마저 해체되고 말았다.
대가야·신라의 혼인 동맹 파탄으로 두 나라는 다시 적대국으로 환원됐고 신라와 화친한 금관가야만 궁지에 몰렸다. 구형왕과 이뇌왕이 가야연맹 부흥을 위한 국제회의를 안라국에서 개최(531)했지만 상호 의견 격차만 확인했다. 가야연맹 붕괴는 호시탐탐 가야 영토를 노리던 백제·신라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국제회의 무산 직후 백제 성왕이 안라국을 쳐 가야의 서부 세력권을 장악했다.
구형왕 12년(532) 9월 신라 법흥왕도 금관가야를 공격했다. 신라군 장수 이사부는 3000병력을 이끌고 다다라원(부산 다대포)에 주둔하며 금관가야 항복을 종용했다. 구형왕은 신라군이 3개월이나 진군하지 않고 대기하는 내심을 간파했다. 구형왕이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8년(524) 전 남방 순행 시의 약조 이행을 확인받았다. 구형왕과 가야 대신들이 국가 운명의 향방을 놓고 격돌했다.
“종묘사직을 수호하는 것도 절박하지만 승리하지 못할 전쟁에서 백성을 희생시키는 것 또한 국왕의 도리가 아니다. 법흥왕과의 협정에서 경들과 가야 백성을 신라가 수용키로 합의했으니 즉시 투항을 공포하라. 하나 될 줄 모르는 잔여 소국들이 어찌 가야연맹을 유지하겠느냐?”
용상을 짚고 일어서는 구형왕 어깨가 들먹였고 대신들도 통곡했다. 왕은 왕비 계화와 김노종·김무덕·김무력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로 가 항복했다. 왕실 보물도 남김없이 신라 왕실에 헌납했다. 구형왕과 왕자들은 법흥왕한테 상등과 각간의 높은 관직을 각각 제수받고 신라 왕실의 진골 신분으로 편입됐다.
구형왕은 금관가야를 식읍으로 받아 옛 가야 백성들이 내는 조세로 복락을 누리다가 경북 기계(杞溪)에서 숨을 거뒀다.
왕은 가야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세 왕자가 유언을 받았다. “망국 왕이 어찌 흙에 들기를 바라겠느냐. 차라리 돌로 쌓아 묻도록 하라.”
투항한 왕에게 누가 시호를 지어 봉정했겠는가. 구형(仇衡)·구해(仇亥)·구차휴(仇次休)는 전해 오는 그의 이름이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에 있는 구형왕릉(사적 제214호)은 국내 유일의 피라미드형 석릉이다. 유좌묘향의 정동향으로 지리산 동쪽 끝 왕산(923m) 계곡에 있다.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저자>
울산·충주 철광산 빼앗기자
재정 등 약해지며 풍전등화
신라 조공외교로 위기 모면
법흥왕 이사부 금관가야 공격
왕자와 투항하고 진골에 편입
가야는 전기가야(42~532·491년)와 후기가야(5세기 중반~562·약 100년)로 구분한다. 한반도 동남방(경상남도)에 존속했던 소국가 연맹체로 개국 초에는 20여 개 나라가 난립해 국명(가야·구야·가락·가라·가량 등)도 다양했다. 일찍이 낙동강(김해)·섬진강(하동) 유역의 무역항을 개방해 국제 중개 무역으로 국가 경제를 지탱했다. 우수한 철기 문화로 신라·백제·고구려와 대등한 4국 체제를 형성했으나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 통일에 실패해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금관가야(경남 김해) 10대 구형왕(재위 521~532)은 사양길에 접어든 국가 운명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13개국으로 유지되던 가야연맹은 신라(동쪽·낙동강)와 백제(서쪽·섬진강)의 수시 침공으로 국경이 자주 변했고 외침에 대한 연맹국 간 공동 대응도 요원한 실정이었다. 김수로왕 건국(AD 42) 이후 유지돼 오던 종주국 지위도 대가야(경북 고령)가 자처하고 나선 지 오래였다. 금관가야에 조공하던 소(小)가야국들도 대가야에 공물을 진상하며 각자도생의 생존 전략을 추구했다.
5세기 들어 가야는 울산 철광산을 신라에 빼앗겼다. 연이어 충주 철광산까지 백제에 점령당하며 가야의 주력 산업이던 철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다. 가야는 양질의 철 생산을 통한 탁월한 무기 제조 기술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과도 동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해 왔다. 덩이쇠를 중원 제국과 왜에도 수출해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충당했다. 신라는 가야의 월등한 금속 제련 기술을 존중해 금관(金官)가야로 호칭했다.
풍전등화의 국가 위기 앞에 전전긍긍하기는 대가야 이뇌왕(10대·재위 494~6세기 중반)도 매일반이었다. 대가야는 섬진강 포구 다사(경남 하동)항을 통한 교역으로 부족한 생필품을 보충하고 있었다. 가야연맹의 관문 도시로 전략적 요충지를 겸했던 다사 항구를 백제가 점령(520)해 대가야의 필수품 조달이 봉쇄됐다.
다급해진 이뇌왕이 신라 법흥왕(23대 재위·514~540)한테 사신을 급파해 결혼 동맹(522)을 청원했다. 신라도 가야 영토 내 백제 세력 확충을 원치 않았다. 법흥왕은 이찬(17관등 중 2등급) 비조부 누이를 대가야에 보내며 종자(從者·시중드는 사람) 100여 명을 수행시켰다. 이뇌왕은 비조부 누이를 왕비로 맞아 월광(11대 도설지왕) 태자를 출산했다. 종자들은 체격이 우람하고 안광이 형형한 장정들이었다. 이뇌왕은 이들이 섬뜩했다.
구형왕 3년(523) 백제에서는 25대 무령왕이 훙어(薨御)하고 26대 성왕(재위 523~554)이 즉위했다. 성왕은 백제 제국 부흥을 실현코자 변방 3국(신라·고구려·가야)을 무차별 침공했다. 구형왕이 이뇌왕에게 연합 전선 구축을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구형왕은 백제와 오랜 우호 관계를 끊고 신라에 조공하며 백제를 경원시했다.
구형왕은 신라와의 조공 외교를 통해 당면 위기는 모면했지만 진즉부터 법흥왕의 야심을 간파하고 있었다. 법흥왕은 가야의 경계심을 이완시켜 국력이 약화하면 신라 영토로 병합하려는 야심만만한 정복 군주였다. 구형왕은 초조해졌다. 구형왕 4년(524) 9월 법흥왕이 남쪽 변방을 순시한다는 정보가 구형왕에게 입수됐다. 구형왕은 굴욕을 감수하며 근위병 10명과 측근 대신 수 명만 대동하고 법흥왕을 찾아갔다.
구형왕은 법흥왕에게 금관가야 국권을 이양할 테니 왕실 가족 안위와 예우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법흥왕은 쾌히 응했다. 뒤늦게 안 가야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이 격분했다. 누란 위기의 국가 운명보다 왕족 생존이 우선이냐며 금관가야 도처마다 민중이 봉기했다. 실덕한 왕의 권위는 회복 불능이었고 이후 구형왕은 시해 위협의 공포 속에 식물 왕으로 소일했다.
비조부 누이 수행 종자들에게서 위협을 느낀 대가야 이뇌왕은 가야연맹 각국으로 이들을 분산시켜 집단 세력화를 사전 차단하려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종자들은 가야연맹 각국 조정에 더 높은 지위와 예우를 강요하며 왕까지 능멸했다. 가야 예복을 거절하고 신라 조복을 착용했다. 이뇌왕이 법흥왕에게 기만당했음을 자각한 건 구형왕이 법흥왕과 망국 후 보전책을 흥정하고 있을 시기였다. 종자 모두 법흥왕이 밀파시킨 간자임을 감지했을 때는 가야연맹의 내밀한 정보가 신라 조정으로 이첩된 후였다.
가야연맹 중 탁순국(경남 창원) 왕이 맨 먼저 격노했다. 종자들의 관직을 박탈하고 본국으로 강제 축출하였다. 곧바로 △가라국(경북 고령) △안라국(경남 함안) △사이기국(경남 의령군 부림면) △다라국(경남 합천군 합천읍) △졸마국(경남 함양) △고차국(경남 고성) △자타국(경남 진주) △산반하국(경남 합천군 초계면) △걸손국(경남 산청) △임례국(경남 의령군 의령읍) △탁순국(경남 창원) △탁기탄국(경남 창녕군 영산면·경남 밀양) △남가라국(경남 김해)의 13국 중 남가라국(금관가야) 구형왕만 제외하고 간자들을 추방했다. 이뇌왕 신뢰는 추락했고 가까스로 유지되던 후기 가야연맹마저 해체되고 말았다.
대가야·신라의 혼인 동맹 파탄으로 두 나라는 다시 적대국으로 환원됐고 신라와 화친한 금관가야만 궁지에 몰렸다. 구형왕과 이뇌왕이 가야연맹 부흥을 위한 국제회의를 안라국에서 개최(531)했지만 상호 의견 격차만 확인했다. 가야연맹 붕괴는 호시탐탐 가야 영토를 노리던 백제·신라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국제회의 무산 직후 백제 성왕이 안라국을 쳐 가야의 서부 세력권을 장악했다.
구형왕 12년(532) 9월 신라 법흥왕도 금관가야를 공격했다. 신라군 장수 이사부는 3000병력을 이끌고 다다라원(부산 다대포)에 주둔하며 금관가야 항복을 종용했다. 구형왕은 신라군이 3개월이나 진군하지 않고 대기하는 내심을 간파했다. 구형왕이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8년(524) 전 남방 순행 시의 약조 이행을 확인받았다. 구형왕과 가야 대신들이 국가 운명의 향방을 놓고 격돌했다.
“종묘사직을 수호하는 것도 절박하지만 승리하지 못할 전쟁에서 백성을 희생시키는 것 또한 국왕의 도리가 아니다. 법흥왕과의 협정에서 경들과 가야 백성을 신라가 수용키로 합의했으니 즉시 투항을 공포하라. 하나 될 줄 모르는 잔여 소국들이 어찌 가야연맹을 유지하겠느냐?”
용상을 짚고 일어서는 구형왕 어깨가 들먹였고 대신들도 통곡했다. 왕은 왕비 계화와 김노종·김무덕·김무력 세 왕자를 데리고 신라로 가 항복했다. 왕실 보물도 남김없이 신라 왕실에 헌납했다. 구형왕과 왕자들은 법흥왕한테 상등과 각간의 높은 관직을 각각 제수받고 신라 왕실의 진골 신분으로 편입됐다.
구형왕은 금관가야를 식읍으로 받아 옛 가야 백성들이 내는 조세로 복락을 누리다가 경북 기계(杞溪)에서 숨을 거뒀다.
왕은 가야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세 왕자가 유언을 받았다. “망국 왕이 어찌 흙에 들기를 바라겠느냐. 차라리 돌로 쌓아 묻도록 하라.”
투항한 왕에게 누가 시호를 지어 봉정했겠는가. 구형(仇衡)·구해(仇亥)·구차휴(仇次休)는 전해 오는 그의 이름이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에 있는 구형왕릉(사적 제214호)은 국내 유일의 피라미드형 석릉이다. 유좌묘향의 정동향으로 지리산 동쪽 끝 왕산(923m) 계곡에 있다.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