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프랑스 총독 관저→ 대통령궁→ 미군 본부 이젠 통일 베트남 상징

입력 2020. 12. 11   17:22
업데이트 2020. 12. 1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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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베트남 ‘통일궁’

프랑스 식민 통치 위해 궁전 건립
독립 후엔 남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쿠데타군 폭격으로 철거 후 재건축
전차 2대 진입 베트남전 종식
현재 박물관…지하 벙커 등 보존 

 

베트남의 통일궁 전경.  사진=픽사베이
베트남의 통일궁 전경. 사진=픽사베이

1975년 4월 30일 통일궁 정문으로 진입하는 북베트남군의 전차는 사이공의 함락과 베트남 전쟁의 종식을 알렸다.  사진=www.usatoday.com
1975년 4월 30일 통일궁 정문으로 진입하는 북베트남군의 전차는 사이공의 함락과 베트남 전쟁의 종식을 알렸다. 사진=www.usatoday.com

통일궁 내 고위 인사들이 사용했던 회의실.  
 사진=www.theblondtravels.com
통일궁 내 고위 인사들이 사용했던 회의실. 사진=www.theblondtravels.com

베트남 호찌민에 있는 통일궁은 베트남의 근현대사가 서려 있는 건축물이다. 1873년 프랑스 식민지 정부가 인도차이나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지은 노로돔 궁전이 통일궁의 시초다. 이곳은 1954년까지 프랑스 총독 대사의 관저로 사용됐다가 제네바 협정이 체결된 후 베트남이 분단되자 남베트남 정권의 대통령궁으로 쓰였다.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62년 군부 쿠데타로 대통령 암살 목적의 폭탄이 떨어져 원래 지어진 건물이 파괴되고, 다시 지어져 1966년 완공됐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의 탱크가 이곳으로 돌진해 들어오면서 베트남 전쟁이 종결됐다. 베트남 통일 이후 통일궁으로 불리며 베트남 역사에 길이 남을 장소가 됐다. 


 
식민통치 위해 지어진 노로돔 궁전이 전신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에 있는 나라로 북쪽은 중국, 서쪽은 라오스와 캄보디아, 동쪽은 바다를 면하고 있는데,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자주 받아왔다. 영국과 경쟁해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1808~1873)는 1836년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 2대 민망(1791~1841) 황제가 벌인 로마 가톨릭 탄압을 빌미 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면서 베트남 침공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1867년 프랑스는 베트남의 남부 지방을 완전히 점령했다. 이듬해 프랑스 정부는 사이공(호찌민의 옛 지명) 중심부에 총독이 머물 궁전을 건축해 1873년 노로돔 궁전이 완공됐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중부를 점령해 1884년 베트남의 전 국토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됐다.


독립하지만 남과 북으로 분단

1945년 3월 9일 일본은 베트남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식민지 정부를 전복시키고 괴뢰 국가(자주성이 없이 외세의 힘에 좌지우지되는 국가)인 베트남 제국을 수립했다. 이때 노로돔 궁전은 베트남의 일본 식민 관리들의 본부가 됐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베트남은 다시 프랑스령으로 돌아왔고 노로돔 궁전은 프랑스 식민 지배자들의 사무실로 복원됐다.

1945년 9월 2일 호찌민(1890~1969)은 하노이에서 베트남 독립 선언을 하고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을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베트남에서의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프랑스와 호찌민이 이끄는 독립운동단체인 베트민이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까지 8년 동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른다.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이 베트남과 라오스와의 국경에 있는 디엔비엔푸에서 크게 패퇴(싸움에 지고 물러감)한 이후, 그해 7월 21일 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베트남을 북위 17도를 군사경계선으로 구분해 남과 북으로 분단시켰다. 사이공이 남베트남의 수도가 되면서 노로돔 궁전은 1954년 9월 7일부터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으로 사용됐다.


남베트남 내 쿠데타로 폭격 당해

대통령궁은 베트남 전쟁(1955~1975)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된다. 이 전쟁은 6·25전쟁(1950~1953) 이후 또 한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서로 대치하며 치러진 전쟁이다. 195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응오딘지엠(1901~1963)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을 수립했다. 응오딘지엠은 토지개혁으로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에게서 다시 토지를 빼앗고, 제네바 협정에서 합의된 총선거 실시를 거부하면서 국민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지엠 정권의 탄압에 맞서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응오딘지엠의 독재와 종교적 편향을 견디지 못한 승려들의 항거로 촉발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1962년 2월 27일 베트남공화국의 두 명의 조종사가 각각 A-1 스카이라이더 전투기를 타고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대통령궁에 폭탄을 떨어뜨려 건물의 왼쪽 전체를 파괴했다. 대통령궁을 복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응오딘지엠은 궁전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짓도록 해서 1962년부터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대통령궁이 1966년 완공됐다.

1964년 8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함에 따라 베트남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됐다. 전쟁 동안 대통령궁은 미군의 작전 본부로 사용됐다. 1970년대가 되자 전 세계에서 미군의 전쟁 개입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1973년 파리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군과 여러 연합군이 남베트남에서 철수했다. 그 후로, 전세는 급격하게 북베트남으로 기울어졌다. 1975년 4월 8일 북베트남군이 노획한 F-5 프리덤 파이터 전투기로 대통령궁에 폭격이 가해졌지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4월 30일 오전 10시45분 북베트남군의 전차 2대가 대통령궁의 정문을 부수고 진입하면서 사이공은 함락되고 베트남 전쟁은 종식됐다.

1976년 사이공은 호찌민으로 개칭되고, 베트남은 남과 북이 통일한 베트남 사회주의 국가로 선포됐다. 대통령궁은 통일궁으로 새롭게 명명됐다. 통일궁은 모든 일이 상서롭고 운이 좋다는 뜻의 吉(길) 자 모양으로 지하 벙커와 4층 구조로 이뤄져 있다. 내부에는 대통령 집무실, 내각실, 회의실, 접견실, 연회실 등 100개가 넘는 방들이 있다. 통일궁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던 시점 그대로 보존돼 박물관으로서 역할과 동시에 통일된 베트남을 상징하고 있다.  <이상미 문화 예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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