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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이자 마찰의 근원지

기사입력 2020. 12. 04   17:13 최종수정 2020. 12. 06   12:54

73 이스라엘 ‘통곡의 벽’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왕 성전 완성
바빌론에 의해 파괴됐다 다시 지어져
로마군 성전 허물고 서쪽 벽만 남겨
이스라엘 ‘6일 전쟁’ 승리 후 점령
옆에 무함마드 승천 알아크사 모스크 
 
45개 돌 층으로 길이 50m·높이 19m
남자는 왼쪽서 여자는 오른쪽서 기도
이스라엘 통곡의 벽 전경.  사진=www.britannica.com

영국 화가 데이비드 로버트가 1850년 그린 ‘서기 70년 티투스의 지휘 아래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멸망시키다’ 작품.  사진=예루살렘 역사 협회

이탈리아의 화가 프란체스코 헤이즈가 1867년 그린 ‘예루살렘 성전 파괴’.  사진=아카데미아 미술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의 성전산과 유대인 구역 사이에 있는 통곡의 벽(Wailing Wall)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기원전 10세기에 솔로몬 왕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론에 의해 파괴된 후, 기원전 6세기에 스룹바벨이 성전을 재건하고 기원전 1세기에 헤롯왕이 증축했지만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다시 파괴될 때 유일하게 남은 벽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이곳 너머로 이슬람 최대 성지이자 무함마드(570~632)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 알아크사 모스크(아랍어로 ‘가장 먼 모스크’라는 뜻)가 있어 이슬람교 신자들은 ‘알부라끄 벽’이라고 부른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예루살렘이 분할되면서 통곡의 벽은 요르단에 넘어갔으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과 구시가지를 점령한 다음에 통합시켰다.


솔로몬 왕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

기원전 10세기에 ‘지혜의 왕’으로 유명한 솔로몬(기원전 ?~912?)은 야훼(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에게 봉헌할 전당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7년의 공사 끝에 완성했다. 하지만 이곳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기원전 634~562)의 침공으로 파괴되고, 유대인 상당수가 바빌론으로 끌려갔는데 바로 성경에 기록된 ‘바빌론 유수’이다.

시간이 흘러 비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기원전 585?~529)가 관용정책을 펴서 바빌론에 끌려온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키루스 2세가 임명한 유대 지역의 총독은 스룹바벨이었다. 귀환한 유대인들은 기원전 519년 성전을 재건했는데, 다리우스 1세(기원전 550~486)의 지원과 스룹바벨의 주도로 제2의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됐다. 이후 로마의 지원으로 헤로데(기원전 73~4)가 즉위했는데, 왕은 기원전 20년경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성전을 증축했다.

100년도 안돼 전쟁으로 파괴

예루살렘 성전은 100년도 채 안돼 전쟁으로 무참히 파괴된다.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지나치게 세금을 매긴 데다 유대교에 간섭하면서 1차 유대전쟁(66~73)이 벌어진다. 66년 로마에서 임명한 유대의 총독인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유대인의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에 바쳐진 금고와 보물까지 착복하는 일이 벌어지자 유대인들은 분노했다. 게시우스가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번졌다. 이 여파는 다른 지방으로 확대됐고 유대를 관할하는 시리아 지방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3만 명의 로마군을 이끌고 직접 군사행동에 나섰지만, 반란군의 기습으로 6000명가량이 죽고 나머지는 뿔뿔이 달아나면서 로마군은 완전히 궤멸됐다.

네로 황제는 갈루스의 패배로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해 그리스에 머물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67년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은 암반 위에 세워진 천연의 요새이며 삼중의 성벽이 있어서 유대인들은 로마군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티투스는 70년 6월부터 9월까지 넉 달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 끝에 결국 함락시켰다.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조롱하듯이 성전의 서쪽 담장 하나만 남겨 두었는데, 이것이 통곡의 벽이다.


이스라엘 전쟁 승리하며 통곡의 벽 소유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다. 다만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일 년에 하루 성전 파괴일인 아브월 9일(양력으로 7~8월경)에만 유일하게 통곡의 벽 접근을 허락했다. 이후 15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오스만 튀르크의 시대가 되면서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오스만 튀르크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가면서 그 수도가 됐다. 20세기 초부터 부상한 시오니스트 운동(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주창된 정치운동)과 함께 통곡의 벽은 유대인과 무슬림 공동체 사이에 마찰의 근원지가 됐다. 성벽 밑에서 폭력 사건이 흔하게 발생했고, 1929년 폭동이 일어나 133명의 유대인이 죽고 339명이 부상당했다. 그 후 1948년 5월 이스라엘 국가의 창립과 함께 아랍-이스라엘 전쟁(1948~1949)이 일어나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에 의해 점령됐다.

1967년 6월 5일부터 10일까지 이스라엘은 ‘6일 전쟁’을 일으켜 이집트·요르단·시리아 등 세 나라 군대를 차례로 격파하고 대승을 거뒀다. 이때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군에 의해 점령됐다.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최대 격전지는 단연 통곡의 벽이 됐는데, 유대교의 최고 랍비가 나팔을 불며 예루살렘의 진정한 귀환을 선포했다.

통곡의 벽은 서벽(총길이 488m)의 일부로 길이 50m, 높이 19m이다. 벽은 45개의 돌 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중 지상은 28개, 지하는 17개로 이뤄져 있다. 유대교는 남녀를 구분하기에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 벽에 가서 기도하도록 분리대가 설치돼 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통곡의 벽이 오랜 갈등을 마무리하고 평화의 벽으로 거듭나길 바라본다.

<이상미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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