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1959 원한의 6·25
작사 이시우 /작곡 이시우 /노래 박재란·조신일
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
유족들 원한 노래에 담아
산야에 묻힌 호국용사 유해
조국의 손길 기다리고 있어
끝나지 않은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다시 부르는 <원한의 6·25> 대중가요를 접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1959년 박재란과 조신일이 듀엣으로 이 곡을 부를 당시 우리나라는 전쟁의 상흔이 아물기 전이다. 1000만 이산가족들의 눈에는 생이별한 가족들의 얼굴이 아롱거렸고, 13만 7000여 명 전사·실종자 가족들은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은 형제들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도시나 산골이나 할 것 없이 전쟁 통에 한쪽 팔다리를 잃어버린 상이용사(傷痍勇士)가 자주 눈에 띄었다. 이분들의 잃어버린 팔다리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그래서 노래 제목에 원한(怨恨·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응어리진 마음)을 앞세웠던 것이다.
노래 속의 화자는 아버지를 전쟁터에 보낸 자녀이고, 남편을 전장에 보내놓고 노부모와 어린 자식들을 홀로 보살피는 미망인이다. 또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는 부모님들이다. 1950년 발발해 3년 1개월, 1129일간 피를 흘린 6·25전쟁은 결국 무승부의 정전협정체결(1953년 7월 27일)로 포성이 멎었다. 인류역사상 4대 재앙은 제2차 세계대전·흑사병·한국전쟁·제1차 세계대전인데, 3번째 한국전쟁이 바로 6·25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77만600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중에 전사자는 20만여 명(우리나라 전사자가 16만여 명이고, 4만여 명이 유엔군)이다. 우리나라 전사자 3만여 명은 6·25전쟁 중이거나 전쟁 이후에 시신을 수습해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셨지만, 아직도 나머지 호국 용사들은 우리나라 산야에 흔적도 없이 묻혀서 조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과업을 수행하는 기관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다. 전쟁터에서 전사·실종된 분들의 유골(遺骨)·유해(遺骸)를 발굴해 모시는 과업을 수행하는 부대·기관은 세계적으로 두 나라 밖에 없다. 미국과 대한민국이다. 필자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장을 끝으로 37년간의 군문을 떠났다. 그 직분을 수행하면서 스스로 작심(作心)한 필적(筆跡), 비례삼불(非禮三不) 귀가국선(歸家國宣)을 가슴속에 가다듬고 봉직(奉職)했다. 6·25전쟁으로 인한 원한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면서 <원한의 6·25> 노래를 절규할 유족들을 위한 시가(詩歌)도 지어서 푯대로 삼았었다.
그 시가 바로 <유해발굴감식단>이다. ‘우리는 / 6·25전쟁으로 전사·실종되신 / 호국영령과 유가족의 중간자입니다 / 보통명사 신원미확인 유골을 정지된 전쟁터에서 모셔 와서 / 신원확인 국가유공자로, 고유명사로 선양하는 / 소명과 사명을 이행하는 나라의 손과 발입니다 // 60여 년이 넘어가는 세월/ 정지된 전쟁터, 묻혀진 땅속 전투호에서 / 경계태세를 유지한 채로 유골이 되어 / 조국의 자유를 지키며 귀환명령을 기다리는 영령들의 / 외로운 시간여행 종결자입니다 / 자유와 조국을 / 호국영령과 전몰유가족을 이어주며 / 비례삼불(非禮三不, 不思·不觸·不動) 귀가국선(歸家國宣)을 거양하는 자입니다(하략)’
<원한의 6·25> 노래를 만든 이시우(본명 이만두, 1913~1975)는 경남 거제 출신이다. 거제문화원 김의부의 연구에 의하면, 1928년 그의 거제초등학교학적부에는 ‘창가에 소질이 있음’으로 명기돼 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우리 민족의 원한과 독립투사의 절개와 슬픔을 아우른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도 이시우의 걸작이다. 그 노래의 모티브는 이시우가 두만강 변 여관방에서 옆방 아낙네의 울음소리를 듣고 영감을 얻었다. 이튿날 울음에 맺힌 한을 듣고서 얽은 노랫말. 그는 그 당시 고향을 생각하면서 <추억>이라는 곡을 구상하고 있었다. 당시 그 지역의 문학청년 한명천이 원 작사자임을 밝혔다. 여기에 이시우가 곡을 붙여서 악극단 예원좌 화술 배우 소녀 장월성이 불러서 방청객들로부터 4회의 재창(再唱)을 요청받았었다. 만주지방 순회공연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 후, 김용호가 이노래의 가사를 개사해 김정구의 목청에 실었다. 이처럼 시대 이념과 대중들의 감성이 얽힌 이 노래는 김정구 가요인생 65년 대표 걸작이 됐다. <원한의 6·25> 노래와 같이 민족의 한(恨)을 얽은 역사의 궤적에 실려 100년 1000년 흘러갈 노래다.
이 노래 발표 당시 22세 본명 이영숙(박재란)은 193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녀가 4세 때 철도국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천안으로 전근 가게돼 가족 모두가 이사를 했으며, 6·25전쟁 중이던 초등학교 시절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열여섯 살 때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활동을 권유한 인물이 당시 인천경찰악대장 박태준(오빠생각 작곡자·1901~1986·대구 출생·계성고 졸·연세대 음대학장 역임)이다. 그의 추천으로 6·25전쟁 이후 육군본부 산하 군예대(KAS)에 발탁돼 활동한다. 박재란은 1957년 데뷔 후 1000여 곡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97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밤무대에 선다. 하지만 불법체류자로 지목돼 귀국을 하고 신림동 고시촌에서 하숙생으로 지내다가 이후 안산의 개신교회에서 권사로 살아간다. 박재란의 딸 박성신(1968~2014)도 대중가수였다. 그녀의 배우자는 개신교 목회자 임인성. 그녀는 2014년 8월 심장질환으로 돌연사했는데, 그녀의 나이 향년 45세였다. 어머니 박재란(이영숙)을 뒤에 두고 하늘 여행을 먼저 떠났다. <원한의 6·25> 노래 속 화자들의 원한은 언제쯤 해맑은 시냇물처럼 산뜻해질까.
<유차영 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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